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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28 부모와의 통화
  2. 2014.05.22 런던의 중반부
  3. 2014.05.22 님포매니악
  4. 2014.05.15 London calling 1
  5. 2014.03.20 2013년 8월의 제주 강정 마을, 금능 해수욕장
  6. 2014.03.20 2013년 8월의 제주 강정마을
  7. 2014.03.11 틸다 스윈튼의 충만함
  8. 2014.03.02 RIP Alain Renais (알랭 레네)
  9. 2014.03.01 제주, 그곶
  10. 2014.02.08 설겆이 1

부모와의 통화

rewind 2014. 5. 28. 05:20
오늘은 근 3주만에 2G 폰을 쓰는 부모와 전화 통화를 했다. 어김없이 길가 공중 전화에서 낯설고도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손 쓸 새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부모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침착하였고 그 비싼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고 하니 중요한 거 아닌거면 괜찮다고 나를 위로했다. 아니 그거 엄청 비싼 거였는데 중요한게 아니라고 그리 나를 감싸주다니.. 눈물이 막 더 나려고 해서 엄마에게 대략의 필요한(!) 말들을 쏟아내고 무뚝뚝한 정내미가 넘치는 아비와는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리고 시뻘거진 얼굴로 루브르에서 헤쀼블리크로 미친듯이 쏘다니다가 종말을 구경 나온 듯한 관람객들이 점령한 카페들을 뒤로 한 채 한적한 곳에 마침내 몸을 밀어 넣었다. 30유로 가까이를 맥주에 진을 마시다가 이거 안되겠다 싶어 모노프리에 가 런던 드라이 진을 한 병 샀다. 입구를 지키던 무서운 엉아가 오더니 찬장에서 꺼내준다. 막 쏟아내고 싶은데 여전히 아무일 없는 냥 보통의 평균적인 끼니와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 큰 일은 아니지만 부모와 쉽사리 연락하지 못하고 지내는 삶이 평생에 처음인지라 조금은 마음이 격해진다. 엄마 얼굴만 떠올려도 눈물이 나는 촌년인지라 부은 눈으로 또 남은 시간 술을 댓병 들이켜 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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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중반부

rewind 2014. 5. 2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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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uxhall bridge에서 길을 헤매는 동안 흡사 해운대 신시가지 일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내게 런던은 이런 곳이야 아니 이래야해라는 생각이 들어와있던 것일까. 하늘을 치고 올라오는 빌딩들을 보지 않아 좋았던 도시였는데 꿈틀거리는 이 도시의 미래의 안위까지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오지랖. 서울은 그러니까 한국은 지금 2014년의 시간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상상하기 무서울 정도다. 어제는 페이스북에 어떤 여자의 옷차림을 두고 비난과 조롱을 퍼붇는 댓글과 좋아요 갯수가 수 만개를 넘었다. 그냥 청바지에 날개 모양 스티치가 붙어있었고 그저 타이트한 스키니진이었을뿐. 런던 어디에서도 누군가의 옷차림이나 행색을 두고 신경 쓰는 걸 못 봤기 때문에 그런 한국의 병적인 태도들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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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도시를 온 몸으로 체감하려고 했던 것인지 신기하게도 지난 며칠간 익숙했던 한국에서의 모습들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난 친숙한 부모란 사람들도 없이 온전히 여기에 존재해 살아왔던 것처럼. 힘들었던 것들도 생각나지 않고 그렇게 1년 만에 꼬박 7-8시간을 자며 평균적으로 행복한 일상을 살았다.

볕드는 버스 2층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어제부터 시작된 생리에 통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항상 극심한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우리 모녀이기 때문에 순간 이 사실을 엄마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지금 핸드폰을 정지해 와이파이만이 가능한 상태고 엄마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 핸드폰을 사용 중이다. 떠나기 이틀 전에야 비로소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주고 컴퓨터를 끄고 켜는 것 정도만 알려드리고 왔지만 확신할 수 없다. 이따금 동네 단짝 친구가 내가 카톡으로 보낸 사진을 멀티메일 문자를 통해 받는 것 정도로 내 생사를 확인하실 터. 갑자기 엄마의 얼굴과 집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겉잡을 수 없는 것들이 몰려들었다. 혹시나라도 전화 할 기회가 생겨 엄마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나와 이 엄마는 주책없이 누가 죽기라도 한 마냥 울음과 그리움을 쏟아낼 것이다.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방 안에 이따금 밤이 되서나 어슬렁거리던 큰 덩치의 딸내미 하나가 부산영화제보다 더 멀고 긴 여행을 떠났으니 지금 정도면 허전함 이상의 것들이 그녀를 찾았을 지도 모르겠다. 투어 버스에 몸을 싣고 도심 곳곳을 촬영하는 무리를 건너편 시야에 둔 채 2층 버스에서 혼자 조용히 썬글라스를 끼고 훌쩍거렸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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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런 삶을 사는 건 아닐테지만 이 여행에서 나는 어떤 행복한 가정들의 표상을 그려본다. 면면이 살펴보기로는 여행자의 시선에 비춘 그들은 명절에 다같이 모여 칠면조를 구워 먹고 난 뒤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올이 잘 풀리지 않는 스웨터를 입고 하하호호. 부모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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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들 중 하나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방마다 "No photography!"하며 지키고 있는 사람들. 빛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들이 제각기 다른 모양새를 띄게 되는데 어떤 그림은 너무도 선명해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속이 메스꺼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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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uxhall bridge에서 찬바람 얼굴로 맞아가며 길을 헤맸던 건 1800년대에 지어진 배터씨독스 앤 캣츠 홈 보호소를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 곳은 대부분 대형견들을 주로 키우는데 공원이 곳곳에 자리해있으니 전철과 같은 대중교통에 케이지 없이 탑승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이 크지 않고 털 안 빠지는 브랜드의 개를 원해요"라고 묻던 한국을 생각하니 또 한 번 갑갑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환경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퇴근 후 나를 허전하지 않게 반기거나 기다려 줄 장식물을 집 안에 꽁꽁 숨겨 놓는게 아니라 언제든 맘 먹고 산책 나가려하지 않아도 거주지 일대에 그런 공간이 놓여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광활한 리젠트 파크에서 지나가던 개를 보고 반기며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굉장히 인상에 남는다. 우리는 그들을 보살 필 기회를 얻었으면 모든 책임감을 다하되 그만큼 의사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걸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그 얄팍한 지식과 생각들은 내려두자. 다 마음으로 통하기 마련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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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 오빠의 부탁으로 모즈 커틀링을 찾으러 캠든 타운으로 향했다. 어차피 핀 뱃지 하나 사기 위해 찾아가려던 참이긴 했지만 뭔가 임무를 부여 받으니 기행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캠든 타운을 속속들이 다 뒤져 모즈 파더를 찾아냈지만 그는 Curnerby street?에 가보라고 조언해주었다. oi 모시기 하는 가게를 또 찾았으나 문을 닫아서 결국 모즈 파더 아저씨가 알려준 대로 그 힌트 하나만 가진 채로 무작정 찾아나서 face라는 문 닫은 모즈 가게를 하나 또 지나 마침내 찾은 sherllys!! 그런데 알고보니 이 곳은 마침 폴 웰러가 단골이라는 성지였었다.... 우리나라 중년배 가수가 음식 가게 찾아가서 사인 한 번 해주고 걸어 놓는 것마냥 그랬는지는 몰라도 관광객인 나야 뭐 별 수 있나. 순간 흥분해서는 나 폴 웰러 겁나 좋아한다며 아저씨에게 묻지도 않은 말들을 줄줄줄 쏟아냈다. 그리고는 커틀링을 발견하자마자 i've been looking for this all day long이라며 시가도 모른 채 무작정 거금을 털어 구입. 그래. 심부름이니까..하며 감격에 겨워 집으로 돌아왔지만 얼씨구.. 오빠가 찾았던 것은 커틀링 이미지이긴 했지만 그냥 모즈 핀 뱃지였던 것. 결국 그 다음날 찾아갔더니 환불이 안된다고 해서 결국 45유로 가까이를 모두 핀뱃지로 바꿔야만 했다. Small Faces같은 헤어 스타일을 하고 어벙벙하게 있던 알바생과 사장님.. 저의 실수와 변덕에도 끝까지 미소 잃지 않아주셔서 감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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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생각해보니 10시간을 가까이 걸어다녔다. 애비로드에서 비를 흠씬 쳐맞고 포르토벨로마켓으로 피신했다가 거기서만 왕복 2시간을 돌아다닌 듯 하다. 준명 오빠가 바버 쟈켓 꼭 사라는 말 한 마디를 던져두어 보는 것마다 눈독을 들였지만 결국 참고 참다가 브릭레인 마켓에서 그 다음 날엔가 샀다.

애비로드도 그렇고 유명하다 싶은 곳들을 우연히 혹은 부러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놀랍고도 그렇지 않은 사실은 그저 누군가가 살아가는 곳들이라는 것. 이미지에 현혹되어 내가 만들고 상상해온 아우라라는 것은 그 곳에 없다는 이야기다. 카메라를 챙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떠나기 전 날에서야 꺼내든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그 곳을 어떠한 애정의 시선으로 닮을 수 있을리는 만무. 볼 것들이야 많지만 사실 아이폰으로 찍는 것들은 대게 기억을 소환해내기 위한 지표에 불과하지 한국에 있던 것처럼 마음을 다해 찍는 사진은 거의 없다. 몇 년만에 이렇게 사진 찍는 것이 아무 감흥 없기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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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포매니악

rewind 2014. 5. 22. 17:04
- 님포매니악

님포매니악에서 손톱 깎는 얘기를 하던 장면이 좋았다. 남자는 세상에 손톱을 깎는 방향에 따라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고 보아왔다고 하는데 거기에 여자가 새로운 반론을 제기해주기 때문. 날선 지적도 아니고 그냥 역시나 심드렁하게 조는 나는 편한 대로 깎아요. 왼편을 쉽게 깎고 나면 다른 오른쪽도 그리 어렵지 않잖아요. 뭐 이런 식. 순간 남자는 놀라는데 나는 내 삶에 이런 의문을 던져주는 이들을 만나는게 가장 큰 기쁨이라 여긴다.

그 다음날 바로 볼륨 2를 보았고 엔딩에 소스라치게 놀라 썅욕을 해댔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고 이 정도 짖궂음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조크라기엔 그 많은 시간들을 모두 엿 바꿔 먹는 태도여서 사실 화가 났다. 차라리 볼륨 1만 보았더라면 좋은 감흥이었을텐데. 자막이 없으니 온전히 샬롯 갱스부르 언니 음성에 매달려야했고 그녀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듣고 있기에 싫증이 났다. 영화 자체가 매우 루즈하기도 함. 이 영화는 섹스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행위 자체에 관음적인 시선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국내에서 이것을 두고 선정적이라고 난리통 피울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 1편에서 조의 섹스 장면과 함께 동물들의 풋티지가 함께 나올 때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냥 정말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는 기분이었다. 샬롯 갱스부르보다는 스테이시 마틴의 발견이 흥미로웠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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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alling

rewind 2014. 5. 15. 01:04
새벽까지 짐을 싸면서도 엄마에게 '나 정말 가는 것이냐'고 물었듯 공항에서도 내내 그 말을 떨쳐내지 못했다. 더 이상 무슨 증명을 원했던 것일까. 평생의 숙원이었는데 왜 이리 설렘조차 없는 건지 스스로가 야속했다. 친구들이 너도 나도 정말 가는 거냐며 분위기를 몰아주는 와중에도 얼떨떨한 당혹스러움에 '응 그런가봐'로 대충 무마하곤 했다. 좋겠다고 부러움을 표하는 이들 앞에서는 나도 그만큼이나 명확한 감정이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사실 더 이상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또 청승맞게 울컥할 것이 뻔했음으로 더 집요한 고민들이 달려들기 전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떠나는 것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2개월'의 시간은 분명 내게 엄청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출국 몇 시간을 앞두고서야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 곳까지 가는 걸까하는 별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내 안의 아빠가 고개를 든 모양. 아빠는 이 여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출국 전 날까지도 정말 가는 거냐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엔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참 흥미로운 부모를 두고 있다. 이 여행의 시초는 사실 루프트한자 메일링을 받고 있던 내가 '유럽 특가'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엄마에게 이런게 있다며 말 한마디를 던진 데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참으로 쿨하게 '그럼 가봐'라는 말 한마디로 딸을 움직이게 한 것. 내 평생에 외국 가서 영어를 써보는게 소원이었던지라 초등학교 때부터 알아 듣지도 못하는 영어 동화 테이프를 따라 들으며 외계어를 중얼거리곤 했었다. 어릴 때의 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와 기호, 특징,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브라운관 픽셀을 이쑤시개로 세고 논다거나 등교하는 길 보이는 사람들마다 그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해보는 일 따위들이었다. 아무래도 외동이었고 나는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엄마가 빌려다주시는 비디오가게 테이프들을 보는 일상이 전부였다. 그 때의 나는 참 연약했었다. 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지켜줄텐데.

갈증을 해소하듯 영화를 찾는 것은 이미지 자체에 대한 매혹도 있겠고 여러 복잡다단한 감흥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도착하지 못한 시간, 공간,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 내던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떻게든 고질적인 반복을 끊고 삶을 흔들어보겠다고 직장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정들을 내쳐버리지 않았었나. 가능하다면 내쳤다기보다는 함께 안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안에서 얻었던 귀중한 시간과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했기 때문에. (눈물 없이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맥주를 마시는데 눈으로 나오고 있다. 나는 칼스버그를 잘 마시지 않는데 처음에는 맹맹한 물 같더니 지금 이게 눈으로 나오고 있다.) '순환'의 힘을 믿는다. 지치지 않고 줄곧 내가 믿고 지지하는 것들에 대해 힘껏 목소리를 실어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혹시나 그런 내 마음을 엿보기나 한건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준 혜민은 탑승 수속 몇 시간 전까지 내내 옆에서 어린 아이들처럼 장난을 걸어주었다. 어떤 때는 굉장히 진중하고 어떤 때는 정말 철없는 아이들처럼 노는 이 친구와의 균형은 참 흥미롭다. 항상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듯한데 아무래도 이 친구와 함께 있으면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점점 나를 지배해나가는 생각 중 하나는 아무래도 사람이란 스스로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향하는 법이다.

탑승 수속 3시간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해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 더 마무리해야만 했다. 공항 내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보험 회사를 찾아갔다. 데스크 너머 한 켠으로 프라다 백을 모셔 놓은 채 얼마 동안 가 있을 거냐는 질문을 이물난듯이 말하는 직원의 태도를 보았다. 아마 나와 같이 떠나는 이들을 이렇게 매일 같이 보며 그 무리에 하루 빨리 스스로를 합류 시키고 싶을 터. 세상에서 내가 하지 못할 일이 있다면 보고 싶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 그 티켓을 팔고 있어야하는 처지가 되는 것인데 아마도 그 일이 그녀에겐 차마 할 만한 일이 못되는 듯 했다.

기내에서는 옆에 앉은 두 아저씨의 눈치를 보느라 7시간동안 기적적으로 화장실을 참았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게 좋았다. 순전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해보자면 나는 비건으로 특별 기내식을 신청했기 때문에 남들이 물기 없는 음식을 먹을 때 '과일'을 먹었다. 남이 무엇을 먹었건 관심이 없다하더라도 간식으로 나온 '치킨랩'을 나는 안 먹는다며 순순히 건네주었으면 '이보게 내가 궂이 window seat을 고집한 데에는 화장실을 가기 어렵다는 것쯤은 감수한 건 맞지만 그 치킨랩 하나 더 입에 물거든 이따가 알아서 내게 눈치껏 기회를 좀 주겠나. 당신도 밥 먹고 나면 화장실 가고 싶을 거 아니냐'

(* 첫번째 기내식은 커리, 두번째는 가지인지 쥬키니인지 가늠 안가는 채소를 쪄서 토마토 소스를 베이스로 한 것 같은데 샐러리와 피망이 섞여있는 샐러드와 함께 먹음. 이 맛 잊고 싶지 않아서 생각날 때마다 떠올리는데 승무원에게 재료 물어본다는 걸 깜빡.)

이렇게 알아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치킨랩은 사실 승무원의 실수로 내게 주어진 것이었고 나는 그냥 그것을 넘겨버릴 수도 있었거늘. window seat을 점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히드로 공항에 착륙할 때 고개를 빼꼼 내밀던 순간 나는 창문 뷰를 다 가리지 않고 슬쩍 옆으로 비켜주는 (당연한) 센스까지 보여줬었음. 좌석에 붙은 모니터 다루는 것도 모르길래 도와주려 했더니 내치질 않나. 그래 그건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화장실'은 나와 모두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염병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젠틀한 영국 신사들을 만나기 이전 극명한 대조를 위해 겪은 환난이라고 생각해버리겠다. 무궁화호로 5-6시간 밤샘 부산행 기차를 타며 영화제를 다녔던 걸로 단련이 되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폐쇄 공포'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11시간의 비행은 제법 이렇게 무난했다(?) 아시아나 항공에서 제공하는 콘텐츠에는 무려 산울림, Janis Joplin, The Clash, WHAM 등이 있었다. 나는 mp3로 알아서 챙겨갔지만 지난해 제주 여행 떄 처음 경험한 이륙이 너무도 불안했기에 The Clash의 'Complete Control'을 볼륨 높여 들으니 모든게 짜릿했다. 그냥 순간 증발해버리고 싶었을 정도였음.

( * 대부분의 친구들이 내가 직항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 예약은 3개월 전에 이루어졌고 이미 당시엔 5월 초 황금 연휴로 인해 러시아 공항에서 숙박해야 할 지도 모르는 33시간의 경유 비행기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며칠 안되는 연휴 동안 모두 다 유럽을 간다니. 참 가늠할 수 없는 나와 당신들의 빈부격차여. 여튼 나는 1년 벌은 돈을 모두 탈탈 털어 간다. 가는게 신기하지)

바깥 창문으로 보이는 대륙의 표면들을 면면이 넋놓고 보는데 새삼 내가 발 딛고 살아온 곳은 정말 일부에 불과하구나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이 느낌에 다가서기 위해 항상 마음 속으로 보이지 않는 도표를 그려왔었다.

아마 중국으로 추정되는 곳은 용맹한 호랑이의 등줄기처럼 모양새가 우렁찼고 거침 없었다. 영국 전까지의 대륙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 곳들인듯 구획이 신기하리만치 나뉘어있었는데 사람들이 삶을 구성하고 건축해나간다는 것이 정말 경이롭게 다가왔다. 영국에 도착하면서는 그 감흥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는데 정갈하게 나뉘어 있는 구획들을 보며 서로의 삶을 정말 존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만큼의 정원을 가질테니 너도 이만큼 가지도록 해." 아니면 정말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삶에 집중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국외라고 해서 빈익빈 부익부가 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지만 보여진 바에 의해서만 판단되기로는 그랬다. 좁은 땅 덩어리에 빼곡히 고개를 들고 올라서는 빌딩들을 보며 느꼈던 답답함에 비해 그것들이 훨씬 나은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긴 비행을 마치고 입국 수속을 하러 나가는 데 아시아나 항공기에 꽉 들어차있던 한국인 몇 다스와 외국인들 소수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심사하는 분 앞에 줄을 서있는데 이건 마치 텔레비전에서나 보아온 파주 영어마을의 한 풍경같다고나 해야할까.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며 그는 '너희는 우리 때보다 훨씬 좋아진 거야. 크크크'라는 식의 인사인지 농담인지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너 여기에 무엇 하러 왔니'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속으로 열 댓개의 대답을 상상했던 데에 비해 약간의 서운함만을 남겨주었다.

여튼 상상했던 것보다 거대하지 않은 히드로 공항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영화 <터미널>의 배경이 이 곳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바로는 그와 같은 것이었는데 터미널과 전철로 이어지는 통로로 나가는 중에도 그저 '코스트코'와 유사한 모습을 떠올렸다. 내내 지금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에 킬킬킬 웃어대며 열심히 이 곳 저 곳으로 시선을 돌려댔다. 수화물을 찾는 데에만 3-40분의 시간이 걸렸고 나머지 1시간 정도는 길을 헤매는 데에 보냈다. 아무런 걱정도 앞서지 않았고 그냥 그 모든 낯선 상황들이 재밌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내게 말을 걸어준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 언니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엘레베이터를 잡아줬던 그 잘생긴 남자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2번인가 같은 엘레베이터를 오르락 내리락했는데 그 때마다 엘레베이터를 홀딩하며 기다려주었더니 두 노부부가 고맙다며 세상에서 가장 포근해보이는 인사들을 건내주었다. 순간 여기 와서 엘레베이터 걸이나 하고 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3초 정도 해보았다.

궂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보겠다고 갖은 애를 다 쓴 것은 효진과의 대화에서 떠올렸던 제주 공항에서 3시간 버스를 타고 강정으로 갔던 기억이 올라왔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결국은 UNDERGROUND를 타기로 했다. 오이스터 카드를 충전해주던 역무원 아저씨는 '여기에 싸인이나 해'라며 창구 사이로 펜과 영수증을 던지다시피 했는데 그마저도 불쾌하지 않고 그냥 순순히 응했다고 하면 지나친 여행자로서의 긍정의 힘이었던 걸까. (결국 마지막 날 지하철역에서는 역무원의 그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 살짝 열이 받았지만 뭐 그 날은 비를 흠뻑 맞았었기 때문에 동등한 상황이라고 보기 힘듬으로 패스.)

to be continued (i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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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패턴의 나날에서 벗어나 마침내 휴식을 취하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패턴은 1980년대에 데릭 저먼과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든 습관이긴 해요. 그래서 큰 조류의 변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봉 감독과의 만남은 새로운 유형의 영화 만들기 파트너십을 맛보게 해줬어요. 조화롭고 친숙하면서도 전에 몰랐던 영감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봉 감독과 다시 일할 기회에 후각을 곤두세울 것이고 전시 아티스트, 큐레이터, 글 쓰는 작가로서 작업도 계속해나갈 겁니다. 어느새 내 마음은 다시 충만해졌고, 새로운 경이를 맞이할 만반의 태세가 됐어요.

2013년 8월 씨네21 인터뷰 기사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4149

2014년 3월 며칠전 가디언지 기사 :

http://www.theguardian.com/film/2014/mar/08/sxsw-2014-tilda-swinton-derek-jarman?utm_content=buffer3c7c4&utm_medium=social&utm_source=twitterbfi&utm_campaign=buffer

인터뷰를 읽다가 그제 혜민과 만났던 주말 밤의 내 마음이 정확히 저 마지막 문장과 같았음을 기록하고 싶어서 담아둔다! 만반의 태세까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근 1년 가까이 혹은 수 개월만에 다시 찾은 감정이라서 좋은데 요 며칠 밥 먹다 씹힌 호치케스, 눈에 핸드폰이 떨어진다거나 오늘 아침 인대가 끊어졌던 경험으로 몇 년째 고생하고 있는 발목이 또 접지르고야 마는 불운이 함께 동행해서. 이 모든게 얼떨떨하고 묘하고 황당하고 좋기도 하고 화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가도 이내 쌔근쌔근해지고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을 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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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고 믿었던 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간다. 오늘은 알랭 레네가 떠났다. 믿고 싶지 않았는지 예하가 전화를 걸어와 사실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대로 영화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한다는게 너무 고문이고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들이 이렇게 떠나가는 것이 불안한 것은 현대 영화들에 대한 불확실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네마테크의 존립 자체가 염려되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다 정말 영화라는 것, 영화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무섭다.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고 마주하는 시간들은 점점 단축되어간다. 필름은 사라지고 각자의 집에서 혹은 지하철 안 핸드폰으로 시간과 공간은 점점 확장해 나가는 듯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소비되고 증발해버리며,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인내는 얕아지고 있다. 최근작인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젊음의 활기로 가득했던 것을 상기시키면 91세 이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저 연극의 일부인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올리베이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는 이미 뱀파이어의 나이로 들어섰으니 죽어도 안 죽은 셈 치자라고 하였지만 그 외 백발의 노인들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아찔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장 뤽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미하엘 하네케, 장 피에르 레오, 장 루이 트란티낭, 엠마누엘 리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한 시대가 통째로 기억 속에만 남게 되겠지.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로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행복한 기운으로 추모하려들겠지만 그것도 잠시 현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때는 어떡해야 하나. 시네마테크로 발을 돌리겠지만 이 보금자리의 미래는 누가 보장해주나. 마음이 어지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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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그곶

rewind 2014. 3. 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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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겆이

카테고리 없음 2014. 2. 8. 00:53
어떻게 하면 내 논리와 경험들을 두고 강경하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하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사실 너무 어렵고 말하는 순간 아차 싶은 순간들이 요즘 들어 많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말하지 않는 방법들 또한 배우게 된다. 말을 털어놓기까지 고민하는 시간에 있어 자기 검열이 시작되고 지쳐버리며 마음 속에 켜켜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사실들이 쌓여만 간다. 제때에 분출되지 못한 것들은 그렇게 하나 하나 스스로에게서조차 위로 받을 기회마저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 혹은 선택들이 생겨난다. 특히 조직이란 곳에서의 소통에서 좌절과 실망을 반복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공감 상실이라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모두가 묵묵부답. 술만 마시면 봇물이 터지는 듯 해도 저마다 아직 씻어야하지 하면서 방치해두는 설겆이나 양말들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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