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미 뱀파이어의 나이로 들어섰으니 죽어도 안 죽은셈 치자하던 우리의 올리베이라 

 이상한 일이다. 그의 영화만큼이나 이상하다. 비오는 밤 즐겁게 술자리에서 웃음을 흘려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또 한 번 거짓말 같은 부고를 접했다. 여전히 기분 좋은 흥에 취해있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년전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만났을 내게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감지했었다. 꽤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그 영화의 이미지들이 기억 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렇게 작년 그의 영화들을 한데 모아 틀어준 서울아트시네마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 미셸 피콜리 할아버지가 위스키를 연이어 주문하던 것처럼 이따금씩 좋아하는 술을 찾아 마시거나 건배를 할 때에는 노년의 세브린느와 마주 앉아 그랬던 것처럼 그를 두고 초를 켜는 날이 여럿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은 어느 시대의 죽음이기도 할텐데 이를 두고 어떻게 발화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영화가 환영이라면, 만져지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에 도달해 결국 손을 바삐 움직여본다. 죽음이라고는 하나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마음으로만 그려보게 될 낙원상가 옥상의 허름한 극장에서 그의 영화들을 보았던 기억. 그와 이 곳을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앞으로 남게될 것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낙원상가 4층 서울아트시네마 

 ‘이 곳을 어쩌다 간간히 찾아왔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어렵지는 않았을까’라는 소용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옥상' 있는 영화관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어마어마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게 거대한 신기루였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트시네마는 그만큼 내게 이상한 열병같은 곳이다. 아마 17년 째 살고 있는 집을 떠난다해도 지금과 같은 마음만큼 그리울거 같진 않다.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수많은 환영들에 사로잡혀 하는 말이겠거니 짐작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지난 20대의 절반은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낙원을 만남의 광장 삼아 친구들을 만났고, 정처없이 헤매이다 겨우 안착해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숙면을 취했으며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요동들을 겪었다. 친구들과 마지막 상영일 날 옥상에 모여들어 마치 초상집 분위기 같다며 깔깔깔 한참을 웃어댔지만 상영 전 극장의 불이 꺼지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여느 때면 맨 앞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눈에 가득 채우고 봤겠지만 그보다도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상영이 끝난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어느 때보다도 대책 없이 아름다웠고 진 켈리의 미소 하나로 3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취해버렸다. 다행이 초상집보다도 졸업식과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 내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고 옥상에 나와 담배를 피며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을 반겼다. 낮에는 옥상 계단에 앉아 처음 이 곳으로 데려와줬던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책임을 물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지 이 곳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겠지만 첫 만남이 언니와 함께였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벌써 그게 8년 전의 일이다.

 해질 무렵의 옥상에 모인 사람들은 난니 모레티 영화의 엔딩 같았고 흐릿한 밤은 아벨 강스의 어느 영화에서 단원들이 마을을 떠나며 손을 흔들어주는 장면의 초월적인 공간 같았다. 김홍준 감독님이 마지막 상영 전 날 말씀하시던게 자꾸 마음에 남는데 어쩌면 10년 이내에 필름으로 영화를 본 경험이 없는 세대가 속출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것 같았지만 옛것을 고집하는 구 세대들의 회포라고만 하기엔 그 날, 그 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목격자들은 너무도 많다. 한 두명이 아니라서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치열하게 돌아가는 필름 너머로 관객들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채울 것이고, 이 목격담은 언제 어디서건 발 없는 유령처럼 발견될 것이다. 오래 앉아있기에는 허리와 목이 너무 아프고 조금만 여차하여 자세를 뒤틀면 잠에 빠지기 일쑤거나 누군가의 시야를 가렸을지도 모를 그 300석으로부터 떠나와서 말이다.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 낙원은 이제 기억에만 남게 되겠지만 우리는 안다. 이 이상한 우정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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