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용서가 가능할것만 같은 연말의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떠한 감정들은 살아남을테고 어떠한 기억들은 그 연말의 풍경에 묻혀 지나가버릴 것이다. 8개월 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 현장의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 중계된다. 더 이상 목말라 할 것도, 갈증을 채울 수도 없는 죽은 몸들이다. 아키카주는 술로 목을 축인뒤 길바닥에서 이를 다시 게워내며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항상 땀과 피로에 절어있는것만 같은 그에 비해 이 꿈은 좋은 냄새가 날 것만 같은, 갈증과는 거리가 먼 순백의 이미지다. 그런 그에게 형사 아사이는 연민이나 분노, 그 어떤 감정마저도 아깝다는듯 하찮은 비웃음만을 흘리며 조롱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어 마주하게 되는 아키카주의 주변인은 그의 아내이다. 한 때는 그도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았거나 주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잔인한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 혼돈 속에서 대뜸 그의 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처음 광고 속 가족의 이미지로 그의 세계를 착각했었기 때문에 실제의 아내를 마주한 우리는 낯선 사실은 낯설어할 것도 없는- 현실에 떨어진다. 그렇지만 엉망으로 보이는 그에 비해 딸인 카나코는 외모도 반듯하고 학교에서도 많은 이들의 동경을 받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 그녀의 방에서 약이 발견되고 아키카주는 자신이 딸을 찾아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얼굴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딸을 왜 찾겠다는 것일까? 후배나 아내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거 같은 그가 이 일로 인정 받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를 두고보고자 한다. 엉망진창인 삶에서 그가 유일하게 판타지를 완성시킬 수 있는 가족의 일부인 카나코. 그것이 과연 꿈에 지나지 않았음을 다시 혹독하게 마주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모든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원될것만 같은 연말의 풍경에 묻어가게 될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것은 지옥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이들을 위로할 생각도 없이 조롱하거나 방관한다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무기력하게 추락하는 소년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강간당하는 다른 소년의 이미지에 적극 개입한다.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 인물이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카메라와 엉겨붙어 피할데 없이 망가져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카나코를 중심으로 현재 그를 찾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만났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떨어진다. 소년의 기억을 다루는 이미지 또한 아키카주가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꿈 속 기억처럼 푸르고 볕 좋은 날들의 모습이다. 비록 소년은 아무도 없는 수면 아래에서만 안전하다는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이 소년에 대한 기억을 다루는 방식은 어느 감정으로도 납득하기가 힘들다. 분명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폭력적인 장면인데 반해 음악은 어느 청춘 영화의 좋은 한 때를 그린듯 모양새를 취하고 카메라의 시선 또한 매우 적극적이다. 그렇지만 상반되는 것들을 충돌시킴으로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더 잔혹하게 나아가는 서사에 대한 놀라움이 아닌 무례한 연출에 대한 거리감이다.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들을 다룬다 할 지라도 연출자의 시선만큼은 인물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락에 몰린 인간들의 끝을 철두철미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면 이야기는 성공한듯 보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누구든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카나코는 사람들에 의해 그저 으로만 소비되어버릴뿐이다. 사랑했던 소년의 죽음이 그녀를 구멍으로 빠뜨려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감정의 동선을 가늠해보기에는 현재의 시간에 회상씬으로 난입해버리는 그녀의 이미지들뿐이기에 역부족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복선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키카주나 그의 딸만큼이나 멋대로 종횡무진하며 반복되어진다.

 그가 가족이라는 완전체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자 폭력적으로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은 인물들간의 감정이 부딪혀서 진행되는 서사라기보다 그저 대상을 종속시키기 위한 행위 자체로만 비춰진다. 물론 함께 교차되는 장면으로 영화의 후반부에야 설명되는 아내의 외도 현장이 부차적인 설명을 돕는듯하지만 중요한건 여기서 아내의 시점으로 다루어지는 장면은 없다는 것이다. 강간 자체도 불편한데 이를 다루는 카메라의 시선이 인물들에게 있어 편파적이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더구나 너도 카나코도 내가 지켜라는 말로 자신의 강간 행위가 사랑이란 감정에 기반한 것이었음을 설득시키고자 하는 것도 모자라 다음으로 이어지는 대사는 쫑알대지 말고 아침밥 지어!이다. 딸을 찾겠답시고 영화 전반을 이끌어나가는 이 인물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아깝다는듯 그를 대했던 후배 동료 아사이의 태도로 일관해야하는 것일까. 최소한의 공감마저 어려운 것은 이 모든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 존중보다 유희가 전면에 있다는 것이다. 연말의 풍경에서 시작되어 마지막에 이르는 장면은 눈밭 어딘가에 묻혀있는지도 모르는 딸의 시체를 찾기 위해 삽질을 시작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것은 언뜻 그가 이루고 싶었지만 꿈속에서마저 실패한듯 보였던 순백의 이미지로도 보인다. 엔딩 크래딧과 함께 딘 마틴의 Everybody loves somebody가 흐른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사랑하지요. 채워지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채워지기 힘들어보이는 그에게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노래처럼 보인다. 그래도 연말이니 다시 사랑을 얘기해보자는걸까. 글쎄. 연출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역부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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