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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숙소에서 곧장 직진하여 왕복 2시간을 산책하고자 했다. 10시 즈음부터 해서 어두워지니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산책이 될 거 같았다. 기왕이면 길목에서 괜찮은 공원 하나가 나타나주기를 바랐지만 강둑을 지나 올라가니 보이는 것은 오로지 공장으로 추정되는 것들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곳은 오후 9시였고 해가 지는 시간이었으며 사람들은 길에 없었다. 서울에서의 9시라면 사람들은 퇴근 중이거나 혹은 야근 그것도 아니면 집이나 술집 어딘가에 속속들이 넘쳐났어야 했다.

런던에서 이 곳으로 넘어오는 중에 시차가 바뀌면서 '1시간'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소도시인 이 곳에서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간다.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간 데 없고 오로지 혼자 맥주를 홀짝이며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린다. 마트에서 라쇼페가 2천원도 채 안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축하는 마음으로 한 병을 사왔지만 숙소에서 내내 뚜껑을 따기 위해 별 수를 다 쓰다가 결국 거품만 축내고 흘린 맥주들만 닦아내야했다. 뚜껑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작년 여름 경민이 엄마와 함께 나눠 마시라며 사준 라쇼페가 생각난다. 여기 함께 왔다면 매일 같이 서로의 병을 따주며 건배를 외쳤을텐데 하는 생각들이 들면서 왜 나는 병따개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혼성 4인실인 이 곳에서 친절한 미소를 지닌 프랑스인 클레어와 싱가폴에서 태어나 얼마 전 호주에서 학교를 마치고 졸업 여행을 왔다는 남자를 만났다. 티모시인가 팀 모시기였는데 이름을 적어둘걸 그랬다. 적어놓고 보니 티모시와 팀 모시기 두 이름의 모양새가 꽤 닮아있다. 여튼 그처럼 젠틀한 남자를 만나본 것도 참 간만이라 꽤나 한참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나는 런던에서 이 곳으로 날아왔지만 그는 곧 암스테르담인가를 들렸다가 그리로 갈 것이라 했다. 같은 2개월의 기한이지만 여기서 누구든 내 여행 일정과 경로에 대해 들으면 놀라는 눈치다. 대부분 열심히 빠릿하게 유럽 군데 군데를 둘러다니는 편인데 비해 나는 오로지 3군데 그것도 파리에만 1개월 반을 머물기 때문이다. 이래서 3개월 남미 여행을 다녀온 상희님이 그것도 턱없이 짧을 것이라 하신 모양이다. 런던에서는 10여일간 하루 온종일 걸어다니며 구미를 당기는 것들에 눈을 열심히 굴리고 다녔다면 여기 브뤼셀은 잠시 방학을 보내고 있는 기분이다. 휴가가 아닌 방학. 런던 호스텔에서는 조식을 먹기 위해서라도 매일 7-8시에 꼬박 일어나곤 했는데 여기 온 뒤로는 10-11시가 되어서나 슬그머니 일어나 침대 위에서 깜빠뉴에 감자샐러드를 발라 우걱우걱 먹어댄다. 깜빠뉴 한 덩어리를 4, 5일에 걸쳐 먹었더니 식비가 꽤나 많이 절감되었다. 대신 더 많은 맥주를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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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시내 중심에는 유서 깊은 성당 같은 건물들이 제법 있다. 누구든 도서관처럼 쉽게 드나들 수 있는데 런던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자율 기부인지라 그냥 놓여진 통에 최소한의 예의만 보이면 된다. 그 중에 하나를 클레망틴과 만난 날 처음 들어갔었다. (클레망틴은 아는 지인의 지인의 딸로 소개를 받아 이 날 잠시 동네 투어에 동행해주었고 여름에 한국에 놀러온다고 하여 그 때는 내가 가이드가 되어줄 참이다.)

"I don't know how to describe this. but the place has a power for sure. it just makes me really calm."

그녀와 헤어지고서 몇 시간 뒤 다시 찾았었는데 다른 이들이 모두 건축물에 감탄하며 스테인글라스와 동상들의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을 때 나는 거기에 앉아 시네마테크 책자를 보다가 졸고 있었다. 어느 곳에 가던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이 유럽 한복판에서 공원이나 이런 공공재는 여행객인 내게 굉장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성스러운 곳에서 졸고 앉아 있었다니 그게 할 짓이냐고 누군가는 뭐라 할 지 모르나 모두가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때 가만히 그 모습을 응시하는 것 또한 다른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이 여행에서 새삼 신기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빛'인데 이게 장소에 따라 달라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는 점.

그리고 성당 앞에는 앉아서 다리를 뻗을 수 있는 모양의 의자가 여럿 놓여있다. 첫 날에는 텅텅 비어있더니 볕이 좋은 오늘 같은 날에는 다들 주위 벤치에 앉아있다가 빈 자리가 나면 바로 기회를 틈 타 그 곳에 몸을 뉘이곤 했다. 대부분 연인들이 한 자리를 비집고 앉아 두 몸을 포개고 있었는데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할머니가 자리를 비키자마자 엉덩이를 붙인 남자 꼬마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그 앞 벤치에 앉으려던 찰나에 그 꼬마를 보았고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던 걸로 짐작하건대 닌텐도 정도나 만지작거리기 위해 자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황급하게 음식을 밀어넣은 뒤 고개를 돌려보니 그 꼬마는 약 10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그 의자에 앉아있다가 이내 일어서서는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핸드폰으로 촬영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감동 받고 말아서 처음에 의레 짐작해버렸던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고 그 꼬마가 의자를 '기억'하는 모습이 참 예뻐보였다. 내가 10대 초반일 때에는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간 수련회가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핸드폰은 물론이고 디지털 사진기가 보급되어 있지 않았던 지라 오늘의 꼬마가 기록한 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도 일종의 그런 '의식'을 가지곤 했었다. 이를테면 처음으로 집에서 멀리 떠나와 2박 3일간 지낸 수련회 숙소에 고별 인사를 전하는 식이었다. 모두가 짐을 챙겨 떠난뒤 비어있는 그 방에 그동안 고마웠다며 속으로 몇 번이고 방 번호를 읊조리곤 했었다. 그 방 번호를 잊지 않고 일기에 잘 적어두었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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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주는 한적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에는 카메라 장비로 무장한 관광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에서조차 찾을 수 없을 거 같은 호텔들이 의외의 장소에 위치해있는데 풍파 같은 삶을 살고 난 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 곳에서 여생을 마감하면 좋을 거 같은 곳들도 더러 있다. 그리고 나는 인사동에서조차 상술이라는 것을 잘 믿지 않기 때문에 마켓들을 보고도 큰 감흥이 일지 않으며 가능한 카메라를 들지 않으려 한다. 조금 뽄새가 웃길 수도 있겠지만 옆에서 nothing else to do?라며 부인에게 질문을 건네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나서 더욱 나는 sightseeing, 관광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된다;;

유럽의 화장실을 생각하면 조금 정내미가 떨어진다. 50센트?를 내고 화장실에 들어가 침묵 속에 자리를 지키며 돈 받고 있는 할머니는 빵을 드시고 나는 대변을 소화시키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순환'의 법칙인가... 그런데 또 의외의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내가 맥주잔을 들고 헬렐레 미소를 흘리면서 두번째로 화장실을 찾았을 때였다. 처음에 달갑지 않게 느껴졌던 화장실 지키미 할머니가 내게 그 주플리에 맥주 꽤 strong할텐데 너 맥주 좋아하니? 이러시는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저 많이 좋아해요 하며 볼일을 보고 나왔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 곳에 갔을 때 그녀는 조금 취한 내가 동전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고 있는 모습 위로 손을 저으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이렇게 정내미 없는 유럽 화장실과 나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것일까.

브리주 광장에서 파는 주플리에 쌩맥주는 정말 인생을 갖다 바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음악들은 어떻고!

브리주 광장에서 신나게 취해 눈가를 적시고 있는 애미가 있다면 바로 나일 것이다. 노인네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나는 3일도 더 지난 깜빠뉴를 뜯어대며 한 잔을 마쳤다. 노부부 사이에 걸쳐앉아 님포마니악의 조가 그랬듯 내 머리 위 그림자를 만들어주고있는 이 나무를 인생의 나무라고 여기리라했다. 오른쪽 할아버지는 이명세 감독님을 닮았다! 두 잔 째에 접어들며 광장에 춤추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노부부들을 보니 또 주책 맞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는데 올려다보니 나무가 보인다. 가장 끝에 있는 잎사귀들은 빛을 받아 하얗고 밝은 연두빛을 띄고 있고 그 아래 다른 잎사귀들은 빛이 오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릴테다. 차근차근 하나 하나. 너도 나도. 모두 그렇게 빛을 기다린다.

눈감고 광장을 애워 싸고 있는 이 음악을 들으니 어렸을 적 오래된 삼촌 방에서 눈에 띄곤 했던 ybm 영어 테이프가 떠올랐다. 수 많은 기억 중에 그것을 떠올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에선가 이 비슷한 선율을 떠올리면 이 날의 볕과 선명한 사람들, 바람이 떠오를까 하는 마음.

4유로 생맥주에는 망설임 없으면서 4유로 까르푸 샐러드 (for 저녁거리)에는 돈 쓰기 힘들어하는 불편한 진실. 3잔 째에 이르러 플라스틱 컵을 자꾸 새것으로 바꿔주려는 것이 내키지 않아 please use this one이라고 청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 여겨지는 것들에 애정을 쏟아붓기 마련이다. 깜빠뉴 한 덩이를 3,4일간 감자샐러드를 발라 먹으며 연명한 나는 남은 모든 유로를 이 브리주 광장에서 쌩맥주를 마시는 데에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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