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정범>은 공동정범이란 이름 아래 국가폭력에 희생 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쫓아간다. 용산 참사 당시 우연히도 바로 두 블럭 옆 건물에 출근을 하던 때였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이들이 돌맹이를 던지며 경찰과 대치 중인 모습을 목격 했었다. 하룻밤 사이 그 곳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기사로도 작성했으며 기회가 될 때마다 남일당 건물에 들렸지만 나는 이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가져가야 할 지 막막했다. 망루에 올라갔던 이들이 출소 후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가늠해 본 적 없었고 영화를 통해서야 그들이 지나왔을 처절하고 잔인한 시간들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망루에 올랐던 이들 중엔 용산 재개발 구역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서 철거 연대 운동을 하던 이들이 더 많았다. 사고 후 살아남은 이들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공동정범'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여 5년간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던건 출소 후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마련한 자리를 통해서다. 개인들의 인터뷰에서 일부는 왜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망루 안에서 마주했던 공포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음에 한탄했다. 일부는 망루 농성을 주도했던 이충연 위원장을 향한 서운함도 드러냈다. 공통된 기억과 트라우마를 가지고도 거기서 비롯된 개인이 일상으로 가져갔을 무게는 다 달랐겠지만 (국가에 의한) '고립'으로 인해 겪었을 상처는 모두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당시 망루에서의 이충연 위원장의 선택을 두고 누구 하나 비난하는 이 없었고 오히려 '나라도 그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위로를 해준다. 이는 5년간 이 위원장을 가장 힘들게 괴롭힌 상처였다. 이들이 와해되지 않고 그 위로의 몇 마디를 주고 받을 기회만 있었더라도 그는 그렇게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않았어도 될지 모른다. 물론 사건 직후 모든 것을 풀어내긴 어려웠을 지라도 조금은 덜 외로웠을거다. 영화 <공동정범>은 이 외로운 이들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 초반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불길이 치솟은 용산 참사의 모습은 지금도 마주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잊지말고 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연대의 시작이리라. 1월 25일 개봉!



* 영화 말미에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이명박과 김석기의 얼굴 (쌍판)을 보면 없던 호랑이 기운도 솟구친다는 ^*^

(당시 작성했던 기사는 신문사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유실되었고 내 개인 블로그로 공유했던 기록만으로 남아있다 : 용산 철거민이 옥상에 올라갈 수 밖에 없던 이유 / 지난 20일 새벽 망루에 올라갔었던 박모 씨 사연 https://blog.naver.com/choi5765/9004133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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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들

rewind 2017. 8. 10. 16:06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지난 며칠은 무서웠다. 감정으로서 무서운게 아니라 그냥 인지되었다. 조금씩 넋을 잃었던 정신이 돌아오고 있고 어제 갑작스런 친구의 부름으로 작업실에 있다가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인생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맥락의 질문을 그는 던졌다. 낮에만 해도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다가 잠든 나머지 의사가 볼을 톡톡 두들기며 '설마 주무세요?'하던 반 수면 상태의 나였다. 먼 여행을 앞둔 또 다른 친구의 짐 싸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내 감각이 없다가 조금씩 3년 전 2개월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나를 떠올렸다. 끊어졌던 맥락이 다시 살아난듯 했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 그녀에게 정말 실감이 안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던 기억 속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다시 끌어냈다. 구글 드라이브에는 당시 여행을 앞두고 챙겼던 준비물들의 목록이 있었다. 그녀는 신발 네 켤레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신발들이 만나게 될 땅의 촉감들을 그려본다. 언니는 많이 걸어다니니 아무래도 한 두 켤레로는 신발들이 무리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이 저녁식사를 할 즈음에야 정신이 제법 돌아왔다. 저녁에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제법 또박또박 문장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그제만 해도 방향을 잃은 낚싯대마냥 허공을 둥둥 떠다녔는데 실체들 앞에서 조금씩 다시 살아났다. 다시 말하는 법을 배우고 표현할 줄 알던 것들을 몸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상대를 위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곧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어떠한 대우를 받았으면 하며 어떠한 것들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는 것. 나는 스스로가 매우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정말 좋았고 안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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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rewind 2017. 7. 11. 22:00

텅 빈 거 같았던 그 때와 지금의 시간. 스스로에게 무엇을 가장 해주고싶은 지 그리고 찾아다니고자하는 지 (띄어쓰기 너무 어렵다..) 사진들을 보며 떠올렸다. 나는 한없이 푸르게 펼쳐진 시내의 그 공원들이 너무 좋았고 후무스와 샐러리 그리고 각종 종류의 요거트와 말린 과일들을 마트에 사다니는 것을 좋아라했다. 어떤 날은 특별한 일정 없이도 무작정 가보지 않은 동네의 마트에 가서 달걀 한 판 사오는 것을 임무처럼 완수하기도 했다. 한국에 오기 전 2주 가량은 달걀 한 판과 감자 1Kg로 버텼으며 일주일 조금 안되게 머물었던 벨기에에서는 커다란 깜빠뉴와 감자샐러드를 매일 아침으로 때웠다. 어느 성당에 들어가 졸다 나오기도 했으며 말도 안 통하는 파리 시내 중심에 있는 수영장에 가 혀꼬인 남자도 만났다. 먹고 걸으며 온 몸에 바람을 스치고 마음이 살랑살랑. 누가 뭐래도 나는 여름밤이 좋아좋아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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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물결

rewind 2016. 11. 1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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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우의 동생은 사람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좋은 일을 하면 천국에 갈 것이며 그 곳은 매일 맛있는 것과 재밌는 것들로 가득할 것이라 답하는 그. 이에 동생은 다시 묻는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왜 다같이 한데 모여 살면 안되는 것인지. 왜 두 세계로 나뉘어 헤어져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에 그는 더 이상 대답을 줄 수 없다. 이를 듣고자 했던 대상도 곁에 없을 뿐 아니라 애초에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죽음이라는 상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지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결국 돌고 돌아 어디서든 그 진실은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지만 말이다. 원희는 이를 피하고 있는 연우 앞에 나타나 진실을 마주하라고 다그친다. 뒷걸음 치는 그에게 끊임없이 손을 뻗는다.


 동생과의 마지막 대화를 상기시켜보면 연우가 아버지에게 묻는 질문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우리 여기 살죠?"라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들이 머무는 그 곳. 단양이라는 동네인 동시에 이승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와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답은 이전에 여기서 공장을 다니려고 했다며 '단양'이라는 데에 가깝게 들린다. 그러나 '이승'인 이 곳에 왜 사느냐고 묻는 의미로 읽는다면 동생의 죽음 이후 그녀의 질문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그의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오토바이로 병원과 집을 오가는 것 이외 달리 만나는 이도 없어 보이는 한적한 그의 삶에 죽음이라는 질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닌 것이다.


 죽음을 앞둔 원희가 그런 연우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슬픈 운명을 암시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가 어떤 답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그가 처음으로 오토바이에 원희를 태워주는 순간. 그 동행을 잊을 수 없다. 카메라는 오토바이에 탄 두 사람의 행로를 오랫동안 보여 준다. 탈 것의 특성 상 두 사람이 밀착되어야 함은 물론 한 번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가면 멈추기가 어렵다. 거리를 두어 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취미라 할 것도 없어 보이는 연우에게 유일한 사치라곤 세련된 오토바이 하나로 보인다. 그것에라도 몸을 싣지 않으면 스스로 나아갈 추진력을 받지 못해서일까. 연우가 오토바이를 몬다기보다 오토바이가 그를 태우고 다니는 느낌이다. 좀처럼 가까워 질 수 없을 거 같았던 두 사람이 소나기 앞에 나란히 서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그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가는 동선이 제목을 닮아있다. 수면은 흔들리며 머물기도 나아가기도 한다. 잔잔한 움직임 안에서 삶은 역동하고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일렁이는 수면은 다 같은 풍경인 것 같아도 오랜시간 지켜보면 매 순간 바뀌고 있는 것들이 합해진 잔상들로서 인식된다. 그런 물결을 거스르고 원희가 가고 싶어 했던 장소를 향해 가는 연우의 모습은 그래서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어진다. 따뜻해지며 꽃이 필 것이기 때문에 연우 안에서도 작지만 큰 생명력이 일어나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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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 love is dead, love is a fantasy, little girl have.

Sarah : love is a stream. it's continuous, it doesn't stop.


[Love Streams, John Cassave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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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활동가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http://todayboda.net/article/7088


라다   우선, 감정은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감정일 뿐이에요. 가치판단은 우리가 나중에 덧붙이는 거죠. 그리고 감정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게 어떤 감정이든 나에게 있다는 것을 허용하라는 거예요. 화가 난다고 무조건 화를 폭발시키라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화가 난다는 것을 느끼고 머무르면서,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충분히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대부분 화가 나면 어떤 사람 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하는 데, 내 욕구가 좌절되었다든지, 내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괴롭다든지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 세밀한 결로 자기를 만나는 게 필요한 거죠.
 
불안 같은 경우도 그래요. 불안이 없으면 우린 생존할 수 없잖아요. 불안을 떨치려 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불안한 건지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해요. 외부의 대상이나 목표에 집중하듯이, 그만한 시간과 열정과 에너지로 자기에게 머물러야 해요. 이것이 심리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자기 성장이 일어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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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캐롤>을 보고 나서 좋았던 장면들을 몇 시간에 걸쳐 열거해보았다.

1. 첫 장면에서 길거리 신문 가판대를 보고 예기치 못하게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지금은 사라진 군밤 장수가 생각났다. 그 길과 느낌이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2. 테레즈가 창가를 내다보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오는데 그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는 모습들 같아 볼 때마다 설렜다. 매번 창문들에 빗물 자국과 같은 얼룩들이 묻어있어 더 좋았다.

3. 테레즈에게 키스를 시도했던 남자. 다른 영화에서라면 주인공에게 트라우마를 주입시켜야 한다는 왜곡된 열망(!)으로 더 밀어붙였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거기서 끝내는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이 부분에서부터 영화 끝까지 주인공 둘을 연출자가 든든하게 지켜주는 느낌이 든다.

4. 캐롤이 테레즈를 집으로 초대하고 나서 남편이 들이닥치자 갑자기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신는 장면. 주체적인 사람으로 보이면서도 오랜 결혼 생활에서 그런 것들이 몸에 배여있다는 디테일이 돋보였다.

5. 캐롤과 떠나는 차 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르고 좋다고만 해왔던 것들에 눈물을 흘리는 테레즈.

6. 어느 부유하고 지루하던 상류층의 파격적인 도발이 아닌 누구나 그러하듯 사람 좋아하는게 그런거지하는 감정선의 자연스러움

7. 캐롤과 테레즈의 첫 식사에서 무얼 고를지 몰라하던 테레즈가 '같은 걸로요!'하는데 당황한 기색 없어 보이려 하던 것.

8. 부유한 캐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그런 듯 보이는 테레즈이지만 둘이 함께 하는 여행에서 누구도 그런 부분에 대해 불편함을 내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맞춰간다.

9. 일례로 캐롤에게 받은 값비싼 카메라 선물에 부담만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선물을 하는 테레즈.

10. 둘이 탄 차를 미디엄 숏으로 빼서 차도에 지나가는 다른 차들에 가려졌다 나타났다하며 함께 찍은 장면이 있는데 약간 세트 같기도 한게 자크 타티 영화의 한 모습 같았다. 요즘에 보기 드문 앵글의 숏이라 느꼈다.

11. 여행에서 다녀온 후 캐롤과 애비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눈뒤 계단을 내려가면서 캐롤의 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 등 뒤에서 애비의 손을 잡았던 제스쳐가 기억에 남는다.

12. 캐롤과 테레즈가 여행 이후 재회하는 장면에서 잭이란 남자가 들어오자 "You two have good evening"이라고 인사하며 테레즈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고 나가는 캐롤. 그리고 이어 반대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나가는 잭의 제스쳐. 이 장면이 처음과 후반부에 두 차례 나오면서 그 제스쳐가 반복되는데 이게 너무 좋았다.

13. 양육권 문제로 캐롤이 남편에게 자기를 부정할 생각이 없다며 이야기하고 나서자 더 구구절절 연장되지 않고 남편의 멍한 표정으로 문이 닫히고 끝나는 씬의 정리.

14. 테레즈가 잭이란 친구와 함께 찾아간 친구의 파티에서 전 남자친구를 마주했을 때 그와 더 맞닥뜨리지 않게 한 것.

15. 이어 키스하려고 했던 타임즈의 친구가 (벽 칠하던 날) 내가 무섭느냐고 물었을 때 "아니 나 너 안 두려운데"라고 대번에 대답했던 테레즈의 결기.

16. 테레즈가 잭과 찾아간 파티 이후 캐롤에게로 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 캐롤이 앉아있던 식당에서의 위치와 테레즈의 시선이 트뤼포의 <부드러운 살결>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되서 순간 긴장되었다. 테레즈의 동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샷도 없었어서 무언가 불안했는데 이어 미소 띄는 캐롤의 모습. 둘이 따라 나가서 포옹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고 개방된 공간에서 캐롤이 (내 세계로) '어서 와'하는 느낌의 반김 같아서 그 선택이 좋았다.

17. 전 남자친구가 여행 가기 전 테레즈에게 지금 그래서 헤어지기라도 하자는 거야? 라고 묻자 이런 식의 너와 내가 만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고 답하던 그녀.

18. 캐롤과의 여행 이후 전화 한 통말고는 그녀를 찾아가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일상을 구축하는데에 집중했던 테레즈

19. 그런데 여행 이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캐롤이 자기 밉냐고 묻자 '당신을 어떻게 미워하겠어요'라고 답하던 테레즈

20. 처음에 트리 사는 시장에서 자신을 사진 찍은 것을 나중에 '넌지시' 물어보던 캐롤. 이에 당황해하지 않고 '친구 말처럼 인간에 호감을 좀 가져보려고요'라며 대답하던 테레즈.

열거해놓고 보면 분명해지는게 연출자가 인물들을 대하는 숭고한 태도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요즘 같이 스스로가 그려내는 인물들이 뭐하는 지도 모르고 후려치듯 찍어내는 시대에 오랜만에 이런 작품을 만나니 오히려 낯설다. 설마 했는데 이게 <아임 낫 데어> 이후 근 7-8년만의 작품이더라. 토드 헤인즈 감독님 같은 분들이 오래 오래 영화 찍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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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나의 위치

rewind 2015. 7. 19. 00:44
취향 
(趣向) [취ː향] 
[명사]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내 편이라고 느끼게 되는건 아주 일순간의 착각인거였다. 마음이 혹하는거다. 사실 나이 들수록 겁만 많아져서 매사 조심스런 마음으로 꽁꽁 싸매다가 어느 술자리에서 낯선 이를 만나 나도 모르게 또 어느 순간 입방정을 떨고나면 기분이 싸해진다. 마음이 홀랑 배시시 벗겨졌다가 주책 맞은 마음을 들킨데에 부끄러워져버린다. 이 간극은 나 스스로가 '뭐, 어때'와 같은 대수롭지않은 겉모양새를 취하는 사람인 동시에 속으로는 겹겹이 번민을 끌어안고 있는 예민한 사람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어느 감독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와 내가 동지는 아니다. 좋은(?) 취향 = (내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보 같은 소리지만 한 때는 동지까지는 아닐지언정 취향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잠시 있었다. 여기서의 취향은 위 사전적 의미보다는 조금 협소한 음악이나 영화와 같이 누리는 문화 취향에 국한되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가 내가 랜시드를 흥얼거리고 있던 차에 그걸 따라 부른다면 당연히 눈이 반짝반짝하겠지. 취향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왔던데에는 분명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들과의 만남을 부정하고자 이 얘기를 꺼내든 것은 아니었고 다만 최근 운이 좋게 어느 협업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곁에 두고 싶어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하는. 공유하는 지점이 겹치는 이들을 떠올리며 한데 모아보았다. 왜 스쳐지나간 많고많은 인연들 중 이들이 지금에 남게 되었을까. 그리고 깨닫는다. 결국 취향이 다가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인해 그들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길을 잃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 같다. 영화도 결국에 한낱 반지르르하고 뛰어난 미장센으로 압도한다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서 '사람'이 엿보이기 마련이다. 대게 보여지고자 만드는 것이니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나의 위치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한다는 일들이 차라리 공모전에 입상을 한다던가 어떤 식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면 모를까 늘 의구심에 진저리를 친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도리어 피하고자 한다. 암만 누가 '좋아요'를 눈 앞에 갖다주어도 여전히 인정욕구에 목이 마른다. 불충분한 피드백도 피드백이지만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어디에 위치되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일테다. '아, 여기 미연씨는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할 때마다 지레 뒷걸음을 치기 마련. 얼마전에는 사진 전문으로 하시는 미연씨라고 소개를 받는 데에서 아, 이거 엄청난 사기를 치게 생겼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화과에 진학해서도 의레 갖추어야 할 장비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도 엉덩이가 닳도록 영화관에나 늘 쳐박혀있기 마련이었던 내게는 한낮 남의 일들 같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나는 늘 '전문성'을 습득한다는 데에 낯설어했다. 무엇을 해도 두루두루 할 줄은 알지만 '야매'의 선에 머물뿐이지 그걸로 돈을 벌어 먹는게 창피하고 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지금에야 할 줄 아는게 그뿐이니 엎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일들에 꾸역꾸역 잔기술을 갖다 붙일 뿐인거다. 시간이 묶여있는 직장생활을 청산한지도 1년이 넘었고 그간 운 좋게도 근근이 먹고 살만큼의 빠듯한 돈을 벌었으며 다양한 일을 접할 수 있었다.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채 온전히 스스로가 드러나는 프리랜서야말로 정말 민낯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스스로에게 선언하며 어떻게든 잘해보자라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정말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밤길을 내달려온거 같다. 그리고 조금 정신을 차려 해보고 싶은 것들로 눈을 돌려보니 막상 시간이 주어진만큼 자금이 없다. 매일 밤 이렇게 위태위태하게 균형과 싸우면서 지내겠지.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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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월드

rewind 2015. 4. 8. 11:29

패턴

 이른 오전 잠시 눈을 떴다가 꿈 속에서 도통 헤어나질 못하고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꿈의 기세에 하도 끌려다녀서인지 잠을 깨고도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을 청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점점 기상 시간이 늦어진다. 아무렴 좋다. 그러다가 내 최상의(!) 패턴이라 정하길 새벽 4-5시에 자서 12시 정도 일어나는게 알맞는거 같다는 결론에 이르는 중. 그렇지만 사실 계속 이럴참은 아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운용하지 않으면 몸이 상하는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거 같으므로 그렇다. 나만큼 잘 먹는 이도 없다고 자부해왔건만 근래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얼마나 불규칙적으로 끼니를 챙기는지 알아차렸다. 하고 싶은 것들을 부랴부랴 끌어안고 가기 위해서 몸을 돌보기로 또 한 번 다짐한다! 

프랑스에서 온 영화 소식

 그러다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작년 여름 만난 샤를렌의 메세지가 한가득 와있었다. 지인을 통해 소개 받았던 프랑스인 친구로 한국 영화를 좋아해 이런 저런 일로 잠시 들렀다가 한차례 만남을 가졌었더란다. 무척 무더운 날이었고 단 몇 시간이었지만 이후 대게 먼저 안부를 전해와준다. 한국말이 워낙 유창했기 때문에 그녀의 품성을 알아차리는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오늘은 본인의 첫 단편영화 촬영 현장 스틸과 감상을 보내왔다. 스틸 몇 장만 나란히 두고 보아도 좋은 빛과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져 참 좋았다.

스쿠터 못 사면 헬맷만이라도 살까

 저녁에 ㅇ언니를 만난뒤 스쿠터를 얻어(!) 탔다. 바람이 제법 찼지만 그 덩치에 작은 혼다 스쿠터 뒷자리에 몸을 구겨넣어 동대문구 일대를 도는데 참 근사했다. 10여년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세상 천지에 동경하는 모든 것을 차지하던 언니다. 고등학생인 애를 옆에다 데려다놓고 담배를 맛나게 피어대며 술을 사주던 언니. 그리고 이상한 극장에 데려가주었던 언니. 무엇보다도 빨갱이었던 언니.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까불거리지 않았었냐고 묻자 "아니, 너 되게 깍듯했지", "너가 내 사진 프린트해서 수첩에 편지 적어준 것도 있었어. 너 그렇게 아기자기한 애였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곤 솔직히 깍듯하진 않았다며 웃는다. 편지 적어준 것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요즘 들어 기억력의 감퇴를 부쩍 느끼는데 결국에 거슬러 남게 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싶네.

 며칠전 친구에게서 들은, 전 직장에서 부당하게 부하직원을 모욕했다던 말도 안되는 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상처로 남게될지를 가늠해보다가 정신이 아찔해졌다. 우리 둘은 내 부모가 어디 가서 그런 대우를 받을까봐 무섭다고 입을 모았다. 늘 염두에 두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린 왜 항상 속는 기분일까

 항상 속는 것이지만 4월의 봄은 아직 춥다. 언니는 '아닌데. 나 작년 4월에 반팔 입고 다녔는데'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린 왜 항상 계절에 속는 기분일까'. 어제 늦은 오후에 집을 나서는데 옷차림을 제법 여러겹 챙겨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늘한것을 느끼니 작년 영국에 도착했던 날이 생각났다. 소문난 영국의 날씨가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변덕스러울 줄 몰랐던 난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갔다가 비바람으로부터 환영 인사를 흠씬 쳐맞았기 때문이다. 도착한 첫 날 시차적응을 못하고 침대 시트에 런닝 반바지와 맨다리를 바스락 바스락 비비며 잠을 설쳤던게 좋았던지라 요즘 그 때 기분을 내보려 전기장판을 켜놓고 일찍이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새벽 5시 40분 / 6시 15분 / 6시 30분 / 8시에 연이어 잠에서 깨버렸다. 핸드폰을 머리맡으로부터 멀리 치워야 할 거 같다.

고스트 월드 만세 스티브 부세미 만세

 엄마가 차려준 생일 상을 든든히 먹고나서 간만에 랜시드를 듣고 있으니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들긴다. 우리집에 좀처럼 방문하는 이가 없기로서니-그것도 이른 아침에-순간 겁을 먹고 볼륨을 낮춘다음 내다보니 중년의 여성이 복도 계단에 앉아 성서를 큰 목소리로 낭독하고 계셨다....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인데 그러던 중 대학 시절 유일하게 랜시드를 좋아한다는 공통 분모 하나로 친해졌던 선배에게 몇 년만에 잡은 약속과 관련해 연락이 왔다. 여기서 내가 머리를 초록으로 염색하고 바이닐 수집하는 이웃집 아저씨 아니 스티브 부세미랑 자면 완벽하게 고스트 월드인데! 아. 어젠가 며칠전 <고스트 월드>의 작가가 새 작품을 내놓을거라는 소식을 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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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rewind 2014. 12. 27. 22:36

 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다같이 어렵게 모인 자리를 애-써 뒤로 한채 집으로 돌아왔다. 식을 올리기 며칠 전 청첩장을 주고자 만났던 그녀는 집에 자기보다 큰 냉장고가 오늘 들어왔는데 그걸 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몰랐더라는 이야기를 조근조근 내뱉었었다. 아직 살림살이가 채 모두 들어오지 않은 그 방에 새하얗고 작은 언니와 냉장고의 모습을 나란히 그려보는데 그게 참 낯설지만 설레고 좋았다. 모두가 입 모아 말했던 것처럼 정말 이 사람만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은게 그녀였다. 그녀를 닮아서인지 모여든 친구들 모두가 어여쁜 미소들을 흘려댔고 아침 댓바람부터 몸살 기운에 악몽을 내리 꿨던 것도 잊을 수 있었다. 결혼한 이들이 신랑 신부를 데려다놓고 함께 얘기하는 유부 토크라는 재미난 자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의 말이 참 기억에 남는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고 싶은게 당연한거다. 결혼이 좋을 때는 참 좋은 거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말고 편하게 그 흐름을 따라라'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잘 살고 싶어진다.

 31일이 마감 기한인 일을 마치기 위해서 터덜터덜 뾰루퉁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만원 전철인 분당선에 몸을 밀어 넣었는데 무리해서 타려고 했던 어느 승객의 손목이 문 사이에 낄뻔 하여 그것을 붙들고 한참을 있었다. 주머니에 넣었던 양손을 빼낼 틈도 없이 그대로 인산인해에 갇혀버렸는데 순간 머릿속으로 이 생각이 지나갔다. '아. 이런게 너무 힘들고 싫어서 직장을 그만둔거였는데...' 그런데 여전히 어려움은 지속된다. 운이 좋게도 일거리는 끊이지 않고 들어오지만 생활의 균형을 잡는데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이 균형은 줄곧 위태위태할 것이다. 그치만 분명 좋은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감수하는 것일테지. 지금 이 시간에는 집에 돌아가 일을 해야겠지만 이를테면 오후 3-4시 사이에 해지는 시각 길을 걸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누리고 있지 않나. 나이 들어가며 알겠지만 모든걸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내 스스로 선택을 함으로 최대한의 군말들을 아낄 뿐이다. 

선택인 것을 진짜 믿을 수 있게 되면 괜한 짓이 줄어들고, 지금에 감사하게 되고, 그러면 가깝고 편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집중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요즘 이 말만치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다. 물론 믿기까지 군말들은 여전히 다닥다닥 달라붙는다만.

만원 지하철에 기가 모두 빨려나가기 직전 내릴 준비를 하며 왼쪽 문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는데 등쪽으로 누군가의 손길을 느껴졌다. 어느 아주머니가 "내릴거에요?"라고 물으며 몸을 들이미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네. 그런데 만지지 말아주세요"라고 굉장히 힘없지만 분명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깜짝 놀랐고 아주머니도 놀란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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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만 하여도 삶이 엉망진창으로 뒹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들은 썩 괜찮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에 일 순간 "아 인생은 재난이야. life is a disaster."라고 뱉어내버렸다. 진작에 처리했으면 무탈할 것을 어리석게 미루고 미뤄오다가 구구절절 토를 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 고인 염증이 이제 터져버린 것인데 불과 며칠 전만 하여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꿋꿋이 다짐을 했었다. 왜냐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여전히 9 to 6 출근을 하지 않는 삶에 짜릿함을 느끼면서 매일 밤 잠들기 전 하루 하루를 선명하게 각인시키며 내일을 기대했다. 누구 말처럼 내가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때가 나를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수면이 조금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것이 이 모양새를 초래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기는 너무 힘드니까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타협을 해야한다고 나 자신 그리고 모든 사회와 약속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지껏 주춤거리고 있는 걸 발견하니 정말 내동댕이치고 싶어지다가도 끝내 어르고 어를 수 있는 것마저 스스로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위해 서울을 횡단한다. 2호선을 갈아타는 왕십리 역사 안 자판기에서는 데자와 밀크티가 800원이지만 같은 역사 내 5호선 방향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는 이 제품이 1,200원에 판매된다. 그렇지만 내가 하차하는 상수역 내 편의점에서는 11월 한 달동안 1+1 덤을 껴주는 행사에 1,200원 프로모션을 하는 지라 늘 아침마다 1시간 가량 목마름을 감수한채 동전을 매만지기도 했다. 어제 알아차린 바로는 환승하는 합정역 2호선 앞 자판기에서는 900원이라는 생소한 가격에 데자와를 판매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몇 푼 더 아껴보겠다고 빈 손으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넌 그걸 마실 자격도 없어라며 정말 엉망이군, 엉망이야.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기 전 거실에 있는 데이브라는 분에게 "I am sorry that i have to make some nosie"라며 양해를 구하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나를 붙들고 흔들었다. "As much as you like!".

...

그 한 마디의 에너지가 보란듯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모든 재난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그래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하루가 오지. 그건 아마 기회일 것이다. 다시 제대로 할 수 있을 기회. 회복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처럼 행운을 만나면서 다시 제 갈 길을 찾는다. 그 갈 길이라는게 정해진 건 없어도 네가 재미있고 정말 좋다면! 그래. 얼마든지!라는 거다. 늘 모자란 나는 좋아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영화, 이미지, 이야기, 공간 많은 것들에 항상 빚을 지고 가는 마음이다.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안간힘 쓰되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을 줄 아는 현명하고도 너무 무르지는 않지만 또 너무 단단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bles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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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들) 되기

rewind 2014. 9. 21. 03:04

<관계 (들) 되기>

안무 : 장홍석 퍼포머 : 장홍석, 이재은 드라마트루그 : 정명주 사운드디자인 : 안준서

 관계라는 것은 노련해질래야 노련해질 수 없다. 마모되거나 혹은 확장되거나 모양새는 가지 각각이다. 지난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2014에서 '소호호뱀' 공연'을 통해 <관계 (들) 되기>를 보았을 당시 6살 무렵에 보았던 어느 클레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근 2주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제목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는데 바로 <패트와 매트>다. 둘은 언뜻 보기에 노련한듯 제법 모양새를 갖춰가며 항상 함께 무언가를 만들곤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망설일 새도 없이 다시 '도전'을 한다. 그 어떤 표정의 미동도 없이 무언으로 '꾸준하고 착실하게' 일을 해나가지만 거기에는 협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드라마가 있다.

 <관계 (들) 되기>의 시작은 흡사 애니메이션 같다. 핀볼 게임이나 어느 기계의 부속물과 같이 두 퍼포머가 정확한 액션들을 취하며 공간을 점유해나간다. 사운드의 어느 부분에서는 1980년대 스즈키 세이준을 비롯해 여러 일본 영화에서 종종 쓰이던 비파와 같은 현악기가 컷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장면에 '킥'을 던진다고나 할까. (특히 나는 <지고이네르바이젠>에서 맹인 셋이 바닷가에서 벌이던 퍼포먼스를 가장 좋아라한다.)

조명이 점멸될 때마다 이전에 위치해있던 둘의 모습은 무대 위에 잔상으로 남겨지며 또 다른 관계(혹은 이전의 관계에서의 연장)가 어느 곳에서 시작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양새의 성질이 달라진다. 때로는 마치 밀가루처럼 둘 사이의 위태위태한 점성이 발생하는가 하면 이내 일련의 행동이 수면처럼 퍼져나가거나 무게가 전이되기도 한다. 그저 신체의 물질화라고만 보기엔 여기에서도 어떤 드라마가 발생한다. 그 드라마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들 관계의 '리듬감'이다. 어긋난 리듬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한 신체가 안정된 공간 내에서 이탈했을 때, 말 그대로 튕겨져 나갔을 때 둘은 표정으로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 관계의 균형은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입으로 털어 먹고 사는, 특히나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대사'로 상황을 이어나가는 내게 이런 '몸짓'들만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작업은 어떤 황홀감을 안겨다 준다. 이후 한예종에서 한 차례 더 있었던 공연은 공간 뿐 아니라 조명이 달라졌고 때때로 어린 아이의 울음 섞인 투정이 추임새처럼 함께 들어갔다. <관계(들)되기>는 너도 나도 모두 다른 리듬과 온도를 근사한 모양새로 패턴화시킨 작품이다.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2014, 소호호뱀 : 관계(들)되기 : 

http://www.seoulfringefestival.net/load.asp?subPage=210.view&search_gubun=&orb=&search_section=&search_category=&search_idx=991


패트와 매트 : http://youtu.be/YS3Mt_5w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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