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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동생은 사람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좋은 일을 하면 천국에 갈 것이며 그 곳은 매일 맛있는 것과 재밌는 것들로 가득할 것이라 답하는 그. 이에 동생은 다시 묻는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왜 다같이 한데 모여 살면 안되는 것인지. 왜 두 세계로 나뉘어 헤어져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에 그는 더 이상 대답을 줄 수 없다. 이를 듣고자 했던 대상도 곁에 없을 뿐 아니라 애초에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죽음이라는 상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지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결국 돌고 돌아 어디서든 그 진실은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지만 말이다. 원희는 이를 피하고 있는 연우 앞에 나타나 진실을 마주하라고 다그친다. 뒷걸음 치는 그에게 끊임없이 손을 뻗는다.
동생과의 마지막 대화를 상기시켜보면 연우가 아버지에게 묻는 질문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우리 여기 살죠?"라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들이 머무는 그 곳. 단양이라는 동네인 동시에 이승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와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답은 이전에 여기서 공장을 다니려고 했다며 '단양'이라는 데에 가깝게 들린다. 그러나 '이승'인 이 곳에 왜 사느냐고 묻는 의미로 읽는다면 동생의 죽음 이후 그녀의 질문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그의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오토바이로 병원과 집을 오가는 것 이외 달리 만나는 이도 없어 보이는 한적한 그의 삶에 죽음이라는 질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닌 것이다.
죽음을 앞둔 원희가 그런 연우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슬픈 운명을 암시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가 어떤 답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그가 처음으로 오토바이에 원희를 태워주는 순간. 그 동행을 잊을 수 없다. 카메라는 오토바이에 탄 두 사람의 행로를 오랫동안 보여 준다. 탈 것의 특성 상 두 사람이 밀착되어야 함은 물론 한 번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가면 멈추기가 어렵다. 거리를 두어 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취미라 할 것도 없어 보이는 연우에게 유일한 사치라곤 세련된 오토바이 하나로 보인다. 그것에라도 몸을 싣지 않으면 스스로 나아갈 추진력을 받지 못해서일까. 연우가 오토바이를 몬다기보다 오토바이가 그를 태우고 다니는 느낌이다. 좀처럼 가까워 질 수 없을 거 같았던 두 사람이 소나기 앞에 나란히 서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그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가는 동선이 제목을 닮아있다. 수면은 흔들리며 머물기도 나아가기도 한다. 잔잔한 움직임 안에서 삶은 역동하고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일렁이는 수면은 다 같은 풍경인 것 같아도 오랜시간 지켜보면 매 순간 바뀌고 있는 것들이 합해진 잔상들로서 인식된다. 그런 물결을 거스르고 원희가 가고 싶어 했던 장소를 향해 가는 연우의 모습은 그래서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어진다. 따뜻해지며 꽃이 필 것이기 때문에 연우 안에서도 작지만 큰 생명력이 일어나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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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 love is dead, love is a fantasy, little girl have.
Sarah : love is a stream. it's continuous, it doesn't stop.
[Love Streams, John Cassave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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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활동가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http://todayboda.net/article/7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