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캐롤>을 보고 나서 좋았던 장면들을 몇 시간에 걸쳐 열거해보았다.

1. 첫 장면에서 길거리 신문 가판대를 보고 예기치 못하게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지금은 사라진 군밤 장수가 생각났다. 그 길과 느낌이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2. 테레즈가 창가를 내다보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오는데 그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는 모습들 같아 볼 때마다 설렜다. 매번 창문들에 빗물 자국과 같은 얼룩들이 묻어있어 더 좋았다.

3. 테레즈에게 키스를 시도했던 남자. 다른 영화에서라면 주인공에게 트라우마를 주입시켜야 한다는 왜곡된 열망(!)으로 더 밀어붙였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거기서 끝내는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이 부분에서부터 영화 끝까지 주인공 둘을 연출자가 든든하게 지켜주는 느낌이 든다.

4. 캐롤이 테레즈를 집으로 초대하고 나서 남편이 들이닥치자 갑자기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신는 장면. 주체적인 사람으로 보이면서도 오랜 결혼 생활에서 그런 것들이 몸에 배여있다는 디테일이 돋보였다.

5. 캐롤과 떠나는 차 안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르고 좋다고만 해왔던 것들에 눈물을 흘리는 테레즈.

6. 어느 부유하고 지루하던 상류층의 파격적인 도발이 아닌 누구나 그러하듯 사람 좋아하는게 그런거지하는 감정선의 자연스러움

7. 캐롤과 테레즈의 첫 식사에서 무얼 고를지 몰라하던 테레즈가 '같은 걸로요!'하는데 당황한 기색 없어 보이려 하던 것.

8. 부유한 캐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그런 듯 보이는 테레즈이지만 둘이 함께 하는 여행에서 누구도 그런 부분에 대해 불편함을 내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맞춰간다.

9. 일례로 캐롤에게 받은 값비싼 카메라 선물에 부담만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선물을 하는 테레즈.

10. 둘이 탄 차를 미디엄 숏으로 빼서 차도에 지나가는 다른 차들에 가려졌다 나타났다하며 함께 찍은 장면이 있는데 약간 세트 같기도 한게 자크 타티 영화의 한 모습 같았다. 요즘에 보기 드문 앵글의 숏이라 느꼈다.

11. 여행에서 다녀온 후 캐롤과 애비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눈뒤 계단을 내려가면서 캐롤의 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 등 뒤에서 애비의 손을 잡았던 제스쳐가 기억에 남는다.

12. 캐롤과 테레즈가 여행 이후 재회하는 장면에서 잭이란 남자가 들어오자 "You two have good evening"이라고 인사하며 테레즈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고 나가는 캐롤. 그리고 이어 반대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나가는 잭의 제스쳐. 이 장면이 처음과 후반부에 두 차례 나오면서 그 제스쳐가 반복되는데 이게 너무 좋았다.

13. 양육권 문제로 캐롤이 남편에게 자기를 부정할 생각이 없다며 이야기하고 나서자 더 구구절절 연장되지 않고 남편의 멍한 표정으로 문이 닫히고 끝나는 씬의 정리.

14. 테레즈가 잭이란 친구와 함께 찾아간 친구의 파티에서 전 남자친구를 마주했을 때 그와 더 맞닥뜨리지 않게 한 것.

15. 이어 키스하려고 했던 타임즈의 친구가 (벽 칠하던 날) 내가 무섭느냐고 물었을 때 "아니 나 너 안 두려운데"라고 대번에 대답했던 테레즈의 결기.

16. 테레즈가 잭과 찾아간 파티 이후 캐롤에게로 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 캐롤이 앉아있던 식당에서의 위치와 테레즈의 시선이 트뤼포의 <부드러운 살결>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되서 순간 긴장되었다. 테레즈의 동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샷도 없었어서 무언가 불안했는데 이어 미소 띄는 캐롤의 모습. 둘이 따라 나가서 포옹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고 개방된 공간에서 캐롤이 (내 세계로) '어서 와'하는 느낌의 반김 같아서 그 선택이 좋았다.

17. 전 남자친구가 여행 가기 전 테레즈에게 지금 그래서 헤어지기라도 하자는 거야? 라고 묻자 이런 식의 너와 내가 만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고 답하던 그녀.

18. 캐롤과의 여행 이후 전화 한 통말고는 그녀를 찾아가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일상을 구축하는데에 집중했던 테레즈

19. 그런데 여행 이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캐롤이 자기 밉냐고 묻자 '당신을 어떻게 미워하겠어요'라고 답하던 테레즈

20. 처음에 트리 사는 시장에서 자신을 사진 찍은 것을 나중에 '넌지시' 물어보던 캐롤. 이에 당황해하지 않고 '친구 말처럼 인간에 호감을 좀 가져보려고요'라며 대답하던 테레즈.

열거해놓고 보면 분명해지는게 연출자가 인물들을 대하는 숭고한 태도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요즘 같이 스스로가 그려내는 인물들이 뭐하는 지도 모르고 후려치듯 찍어내는 시대에 오랜만에 이런 작품을 만나니 오히려 낯설다. 설마 했는데 이게 <아임 낫 데어> 이후 근 7-8년만의 작품이더라. 토드 헤인즈 감독님 같은 분들이 오래 오래 영화 찍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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