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기회 /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아쉬크 케립 /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불운 / 안제이 뭉크 

민들레 / 카린 타르디외

사이드 바이 사이드 / 크리스토퍼 케닐리

제5계절 / 피터 브로센, 제시카 호프 우드워스

홀리 모터스 / 레오 까락스

닉 / 포 핑 후

옛날 옛적 카불에서 / 모함마드 알리 로우낙, 카렉 아릴, 술탄 하미드 하쉠

잠자는 미녀 / 마르코 벨로치

이매진 / 안드레이 야키모프스키

아넬리 / 안테이 파락

파라다이스:러브 / 울리히 자이델

시저는 죽어야 한다 / 파올로 타비아니, 비토리오 타비아니

5월 이후 / 올리비에 아사야스

메콩호텔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치리(흔적) / 가와세 나오미

신원 미상 /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비욘드 더 힐즈 / 크리스티안 문주

물 / 모하메드 바크리, 니르 사아르, 마야 사르파티, 모하메드 푸아드, 아마드 바르고티, 요나 로젠키엘, 요아브 샤비트, 탈 하링, 피니 타브거, 헬리 하르디

모든 뮤지션들은 개자식이다 / 헤레리 사아릭

1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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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들

장면채집 2012. 9. 15.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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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대 시네마테크에서 오늘 6일부터 토요일인 8일까지 '서울복지필름페스티발(http://swff.tistory.com)'이 열린다. 영화 한 편당 티켓이 2천원으로 이는 모두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용산 참사 부상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사실 오늘 개봉 이래 관람을 미루어 온,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던 <두개의 문, 2011>을 보았다. 우연히도 참사가 일어났던 당시 2009년 1월 나는 용산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휴학을 한뒤 고등학교 때부터 활동해온 청소년 언론사에서 취재 기자로 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한지 한 달 즈음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고가 일어난 용산 남일당은 그 사무실로부터 약 2, 3블럭 떨어진 근방에 위치해있었다. 다음날 무슨 일이 닥칠 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그 날 남일당 건물 일대에 전경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누군가 돌을 던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중대 병원 앞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그 건물로 가는 골목이 보였지만 길목에는 돌맹이가 군데군데 있었고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듯 했다.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건지 사건의 발단을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철거민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길 그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얘길 들었다. 엄청난 무기력함에 휩싸였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형제가 하루 아침 사이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버린 것이다. 영화에서의 진술들에 따르면 사건 당일 저녁까지도 시신들의 행방은 물론 신원까지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 구타의 흔적이나 여러가지를 신속히 은폐하기 위해 경찰 쪽에서 시신들을 각기 다른 병원의 영안실들로 빼돌렸을 거라는 것.

  <두 개의 문>이 개봉함과 동시에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지인들에게 관람을 권유하였지만 막상 나는 기억의 저편 뒤로 숨어 있었다. 그 날의 먹먹함과 공포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 안에서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비로소 오늘에야 그 날을 다시 마주하고 나니 오히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단단해진 기분이다. 보는 내내 너무 화가 나 이를 악 물고 눈물을 참았는데 가장 무서웠던 것은 불길에 휩싸인 망루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동료가 죽은 것이 '농성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경찰 특공대원의 한 마디였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자신에게는 그 어떤 상황에 대한 이해와 본능적인 생명 위협에조차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하나같이 입 모아 말하는 이들. 철거민 유가족들을 변호하는 이마저도 일개 대원이 진압을 유보해야 하지 않느냐고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이에게 말하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소통의 구조적 문제가 특공대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권력이라 자행되는 모든 폭력의 시발점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며' '성공적인 진압을 했다'고 말했던 계급 높은 이들. 무엇이 그들을 약자들 위에 군림해도 된다고 말하는지 너무도 화가 나고 무섭다. 가장 인간으로서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우리가 왜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를 무기력함에 젖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마주 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다. 12월 대선 때까지 영화 <두개의 문>을 극장과 공동체 상영 그리고 IPTV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영할 예정이라 하는데 더욱 많은 이들이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애써 마음을 다독이지만 아직 부단히 갈 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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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rewind 2012. 9. 3. 02:24

 내가 태어난지 7개월 되었을 당시 엄마와 나에겐 이웃이 있었다. 잦은 출장으로 아빠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아직 만삭 상태였던 그 이웃을 비롯해 이후 다른 새댁들과 엄마는 꽤 절친한 친구 사이로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지금이야 다들 사는 곳도 다르고 바빠 연락을 많이 못하지만 자녀들이 또래의 나이였던데다 동네가 같았던 만큼 인근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아마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망년회를 함께 여시는 등 대부분의 시간들을 함께 보냈던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어머니들을 자연스레 이모라 부르며 자랐고, 키도 훤칠하니 음식을 가리지 않는 내게 이모들은 밥상 앞에서 본인의 자녀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 만족하시곤 하였다. 때문에 "많이 먹어", "우리 미연이는 어쩜 그리 복스럽게 먹니"라는 말이 늘 끊이지 않았고 지금의 넉넉한 식성은 아무래도 그 때로부터 기인한 듯 하다. 지금 이 글을 끄적이게 된 것은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한 이모의 자녀 그러니까 나의 초등학교 동창의 소식을 듣고서다. 7개월 이상 차이로 늦게 태어난 아이는 줄곧 나를 언니라 부르며 지내다가 빠른 년도생으로 함께 국민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러더니 대뜸 어느 날부터 이모의 말대로 친구 먹으라며 "야"라고 부르기 시작해 내가 기분이 못내 상해있던 것이 중학생 때까지도 계속 되었었다. 그런 친구가 7살 많은 남자친구로부터 청혼 비스무리한 것을 제안 받은 모양이다. 친구의 어머니인 이모는 엄마를 붙들고 이 늦은 새벽까지 속상한 마음을 털어 놓으셨다 한다.

 오늘 낮 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본 뒤 지인과 '결혼'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장건재 감독의 <잠 못드는 밤, 2012>이었는데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와의 동행하는 삶을 꿈꾸고 싶다 하였고 나는 오히려 그렇지 못할 것만 같다는 반응이었다. 부부 2년 차에 아이를 가질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현수(김수현)와 주희(김주령)는 함께 자전거도 타고 별을 보는 등 함께 나란히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이들이다. 특히 주희 역을 맡으신 배우의 나긋나긋한 음성과 애정 어린 표정이 가져다 주는 느낌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러나 각자의 무의식이 담긴 꿈 속에서 이따금 불안이 스며 나오는데 여기서만큼은 사소한 다툼 한 번 없었던 그들에게 말 한마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서로를 향해 달려들다 못해 조여온다. 롱테이크로 보여지는 이 장면에서 두 배우의 호흡이 너무도 놀라웠는데 때문에 더 옴싹달싹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사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 특히 가족과의 감정이다. 하물며 부부란 오랜 시간을 각자 다른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자라 온 이들인데 이것이 울타리 안에 놓여 버리니 얼마나 많은 것들이 깎이고 떨어져 나가며 또 보태지겠는가. (뭐 다른 경우들도 있을테지만 내가 그리는 결혼의 이미지 안에서는) 근래 돐을 막 지나온 사촌 언니네의 조카 딸을 보노라면 어림조차 되지 않는 누군가와의 삶이 기대되는 면도 한 편 물론 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엔가 자라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치만 모르겠다. 모를 수 밖에 없다. 내년 봄 즈음 졸업하는 동시에 그 친구의 청첩장을 받게 되면 난 기분이 어떨까. 운동화는 안되겠지. 그 생각부터 먼저 드네.

 아. 지금 또 생각이 났는데 오늘 카톡으로 좋아하는 언니의 청첩장을 받았다. 지난 여름 즈음부터 하여 간간이 이 커플의 모습을 지켜봐온 나로서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마냥 마음이 예쁘고 맑아 보이는 언니여서 그리고 배우자가 되실 분도 무척 좋아보이셔서 부럽다. 그 날은 좋아하는 이들로 북적북적거리며 모두들 한탕 거나하게 취해있을 것이다. 영화 촬영 도중이라 마음 한 구석은 붕 떠 있을테지만 가을에 이런 피로연이라니. 아, 또 사람 일은 모르는 건가. 아, 가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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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단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고 있을 때 내가 매우 정확한 어떤 것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릴러 영화나 갱스터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그 영화의 프린트를 보았을 때 나는 내가 만든 영화가 추측하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카페이스의 아들>이나 <돌아온 스카페이스>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너는 문제가 있어, 친구, 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두 번째 영화를 시작했을 때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해, 꿈꾸는 것이 아니야, 라고. 그래서 아마 그 때문에 나는 항상 ㅡ 심지어 영화 속에서도 ㅡ 이것은 영화이다, 꿈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 고다르 X 고다르, 고다르 : 인생과 영화는 차이가 없다 P.56



주문처럼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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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들을 기록을 통해 그 면면을 포착하거나 붙잡아 두고자 한다. 아내를 홀로 둔 채 망망대해로 떠나와 있는 폴은 하루 8 시간 가량을 흔들리는 뱃속에서 기계와 씨름해야하는 화물선의 선원이다. 별안간 배를 이탈해 리스본의 한 항구에 내린 그는 쉴 새 없이 8 미리 카메라로 자신과 주위 풍경의 모습을 담아간다. 이것은 아내에게 영상 편지로 전달되어 스크린으로 다시 영사된다. 좀 전에 본 낯익은 모습들이 8 미리로 촬영된 것을 다시 볼 때 우리는 그와 함께 동행하며 도시를 거닐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백색도시>는 바로 이 남자와의 언제 끝날지 모를 동행이다. 일상 속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찾아올 지 모르는 감정들의 여백에 대해 생각하며 그를 응시하게 되는 것. 기약 없는 이  여행객은 누군가들의 일상 속에 몸을 내던진다. 춤을 추기도 하고 주먹질에 얻어 맞기도 하며 하물며 소매치기까지 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여자를 만난다.

 폴은 백색이 곧 고독이라고 말한다. 백색은 모든 것에 흡수되버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빛으로써 그것들을 잠식시킬 수 있는 힘도 지니고 있다. 여자는 사랑에 빠져들다가도 지금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어딘지 끊임 없이 재차 돌아본다. 늘 느긋하게 웃어 보이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불안은 돌고 돌아 결국 그가 방문자란 사실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실제로 화물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감독이 담아낸 리스본의 풍광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쓸쓸해보인다. 영화의 첫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푸른 물결이 안개에 가려져 있는 가운데 아득히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뒤에 한 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여자의 몸은 광활하며 바다와 같다는 말을 남긴채 그는 어디론가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바다만이 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색도시>는 이 기억들을 어루만지며 놓치지 않기 위한 모든 '방문자'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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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영화

rewind 2012. 8. 23. 02:07


 동네 카페에서 자리를 잡아 졸업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내가 있던 구역이 마감할 시간이 되었다고 하여 주문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왔는데 갑자기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초,중학교를 함께 나온 한 때는 둘도 없는 사이라 생각했던 친구다. 굉장히 반가워하는 기색에 나 예뻐지지 않았냐며 여기서 무엇 하느냐고 묻는 그 아이. 그 때처럼 여전히 당차고 거침 없는 말투를 지녔다. 멋쩍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나는 그대로지?"라고 물으니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는 이어 "살이 너무 많이 쪘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하자 작가냐며 묻는다. "어, 아니 아직 학생이야. 졸업 영화 준비해." 대뜸 양 손으로 하이 파이브를 청하더니 열심히 하란다. 그리고는 언제 한 번 같이 밥을 먹자며. 지나 온  '관계'를 두고 이전 같지 않은 마음과 상황들에 대해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의 시각과 장소의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지. 마치 내가 키보드로 적어 나가던 글에서 튀어나온 상황 같음에 쓴 웃음을 흘렸다. 아마 그 친구와 난 함께 밥을 먹을 일이 없을 테지. 카페 안을 온통 너털웃음으로 채우던 그 친구는 그렇게 오빠들 무리와 함께 기척 없이 사라지고 없다. 밴드 Gong의 노래들을 2시간 반째 반복해서 듣고 있다.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떼워 그런지 허한 속을 음악이 채워주고 있는 기분이다.

2012년 8월 23일 새벽 2시


- 오늘은 2학기 수강 신청을 했다. 이렇게 여름방학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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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지하철, 1980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극장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고 영화가 시작되는데 왠지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 지하실에 갇혀 지내야 했던 남 주인공에 대한 어슴푸레한 기억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에서도 비가 내렸다. 마치 상영관 위층으로 올라가면 까뜨린 드뇌브가 좀 전의 연기가 어땠느냐며 물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상영이 끝난뒤 일전 이수에 있던 극장에서 <누들>이란 영화를 봤을 때의 기억이 올라왔다. 꼬마 남자아이가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 트렁크 가방 안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더란다.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뒤 텅 빈 상영관에 앉아 있는데 문득 내가 트렁크 가방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무한히 샘솟는 희망을 안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 <마지막 지하철>은 보고 나자 극장 안이 엄청난 고독감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언젠가 집에서 조그만 모니터로 보았던 영화와 동일한 것이라기엔 감흥의 여파가 너무도 다름에 또 한 번 놀랐다. <이웃집 여인>의 경우 연소해버린 잿더미 속 같았다면 이는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불길함으로 인해 스크린 너머에 미처 꺼뜨리지 못한 혹은 꺼뜨릴 수 없는 불씨를 두고 극장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연극 연출가 뤼카 스타이너(헤인즈 베넨 분)는 남 배우 베르나르(제라르 드빠르디유 분)에게 아내 마리옹(까뜨린 드뇌브 분)이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이 있음을 첫 만남에서 넌지시 대화를 통해 전한다. 내내 흔들림 없이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마리옹이 남편 뤼카가 거처하고 있던 지하실을 독일군이 수색하려 하자 베르나르에게 도움을 청한 때다. 붉은 화장과 옷에 흐트러짐 없는 머리와 눈빛으로 무장한 그녀는 남편의 빈 자리를 대신해 굳건히 극장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남편에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마음 속으로 불안과 처절히 싸우고 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인다. 앙트완 드와넬 연작에서 보여진 트뤼포 감독에 대한 인상은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상황들을 유희하듯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지하철>을 포함해 <이웃집 여인>, <부드러운 살결>과 같은 작품에서 그는 놀랍도록 감정의 결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끓는점 직전까지 치고 올라가는 그 여정을 보노라면 정말 경이로운 감정의 환희를 앓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메리카의 밤>에서 촬영장 곳곳에 상주하고 있는 뜨개질 할머니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계산 하에 두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배우들의 호흡에 맡긴 부분이 더욱 큰 것인지에 대한 여러 궁금증들 때문이다. 만일 과거로 돌아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나 혹은 그 도처에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면 트뤼포 다음으로 최근 들어 역시 이러한 의문들로 나를 자극 시킨 자크 로지에 감독에게 <오루에 쪽으로>의 연출 비화를 묻고 싶다.


 다시 <마지막 지하철>로 돌아와 마리옹이 감춰왔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을 꼽아보면 베르나르가 레지스탕스를 위해 떠난다며 짐을 챙기던 때다. 아마 그 전에도 둘 사이의 미세한 제스쳐들이 몇 차례 있었던 걸로 짐작한다. 예로 그가 여자들의 손금을 봐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옹의 곁눈질 시선 등이 그러할테다. 지하로 새나가는 남편의 귀동냥 없이 온전히 둘만 방에 있게 되면서 처음으로 밀회를 즐긴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재회하게 된 둘. 배경은 병원으로 베르나르는 부상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극장을 떠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는 여인을 옆에 두고 텅빈 눈빛을 띄고 있다. 이전의 모습은 간데 없이 비로소 둘만의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애정을 구하는 마리옹. 그녀가 남편으로 추정되는 이의 부재를 전하는 순간 나와 관객 모두는 이제 새로운 연인들의 앞날이 시작되는가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뤼카가 연출한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생각해 볼 여력도 없이 지상으로 올라 온 뤼카가 무대 위로 올라 관객들에게 소개되고 박수를 받는다. 여기서 마리옹은 잠시 주춤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양 손을 잡고 인사를 올린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감정이 있음을 인지했던 상황, 그러니까 지하에서 지내던 중에 쓰여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이 좀 전의 우리가 착각할 뻔 했던 모습인 것이다. 800여 일간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할 지라도 수 만번이고 엄청난 고독과 싸우며 무너지는 과정을 온 몸에 아로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박수 치며 환영하는 뤼카의 모습은 너무도 말쑥하며 그 누구도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가늠해보기 힘들다. 아내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당사자 앞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말한다는 것은 본디 뤼카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도 있을 지 몰라도 이미 수 차례 그의 상념들 속에서 손으로 지면으로 그리고 무대 위로 향할 준비를 하며 떠나가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이 감정의 누수를 목도한 순간 <마지막 지하철> 또한 파국을 향하는 <이웃집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들은 과연 마지막 지하철을 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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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미 소리가 온 도시를 채우고 구름들은 서둘러 몸을 옮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부딪히고 메아리가 되어 내 주변을 온통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신촌에서 이대로 넘어가는 횡단보도 앞, 구름 떼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불이 다시 한 번 바뀌었을 때 딛고 있던 발을 떼는데 순간 이대로 세상 어느 끝에 이르러 낭떠러지와 같은 곳으로 말려 들어가도, 혹은 내가 산산조각이 나도 전혀 이상할 거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운 두려움은 아니었지만 마치 다른 너머로 이미 가 있는, 또 다른 내가 그 짐을 안고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듯 했다. 가장 이상했던 7월 30일 여름밤 아침 7시 14분


동이 틀 때까지 술을 이빠이 마시는 날은 세상이 요동치는 기분이다. 이 날 조르주 들뢰르의 새 소리나는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거짓말처럼 비둘기들이 춤을 추었다. 사진은 그 전 날 오후 종로 낙원상가 옥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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