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rewind 2012. 10. 15. 19:50
 

 5회차로 예정되어 있었던 학교 후배의 졸업 영화 촬영이 무사히 4회차로 마무리 되었다. 붐 마이크를 들고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따라 뒷걸음질 치는데 길가에 스며든 새벽 공기가 몸의 이곳 저곳에 옮겨 붙더니 결국 경미한 감기 몸살에 걸렸다.

 철도길 옆에서 노을을 맞으며 마지막 씬 촬영을 하는데 난니 모레티 감독의 <빨간 비둘기>가 생각났다. 매해 부산을 찾을 때마다 서울역에서 마주하던 풍경에서 <가족의 탄생>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듯 언젠가 나도 영화에서 등장인물을 모두 한 데 모아 내가 손 흔드는 모습으로 마무리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1시경이 되어서야 뒷풀이를 하러 돈암에 갔다. 닭한마리 집에 들어가 모두가 소주를 한 잔씩 기울이는데 그 앞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두 어 시간이 지났을까. 다들 노곤한 몸에 취기가 찾아 들어 웃음을 흘려댔다. 종필 선배를 두고 양조위를 운운하는 이들에게 눈을 째렸다. 새삼 체감하는 것이지만 결국 영화라는건 내가 가보지 못한,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이들의 삶을 엿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끄럼 많은 줄로만 알았던 후배가 연출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들을 감지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황홀했다. 매일 밤 촬영이 끝나고 집에 들어 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미미한 소음이 찾아들 때마다 머릿속으로 "아, 잠시만요"라는 말이 불쑥 찾아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액션"을 외쳐주기를 기다리다 한참을 잠을 설쳤다. 

 그리고 얼마전 내 시나리오를 두고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코멘트 해주었던 어느 선배의 말과 벨라 타르 감독의 인터뷰 글을 함께 떠올렸다. 부산을 다녀온 뒤 지속적으로 날 지탱해주고 밀어 붙이는 생각은 내가 지나 온, 믿었던 영화들에 대한 확신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지의 영화들에 대한 꿈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영화의 소품으로 사용되었던 꽃다발 두 개를 품에 한 가득 안고 있으니 기사님께서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신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내리게 되는 상황에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던 차에 아저씨의 보물 1호인 LP 1천 장에 대해 전해 들었다. 갑자기 또 신이 나 밤 산책을 더 할까 했지만 택시비가 없어 마음을 접어야 했다. 꽃다발 하나를 건네드리니 내일 아침 아내가 식탁에 놓여있는 걸 보면 좋아하겠다며 기쁘게 받아주셨다. 이렇게 그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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