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월드

rewind 2015. 4. 8. 11:29

패턴

 이른 오전 잠시 눈을 떴다가 꿈 속에서 도통 헤어나질 못하고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꿈의 기세에 하도 끌려다녀서인지 잠을 깨고도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을 청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점점 기상 시간이 늦어진다. 아무렴 좋다. 그러다가 내 최상의(!) 패턴이라 정하길 새벽 4-5시에 자서 12시 정도 일어나는게 알맞는거 같다는 결론에 이르는 중. 그렇지만 사실 계속 이럴참은 아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운용하지 않으면 몸이 상하는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거 같으므로 그렇다. 나만큼 잘 먹는 이도 없다고 자부해왔건만 근래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얼마나 불규칙적으로 끼니를 챙기는지 알아차렸다. 하고 싶은 것들을 부랴부랴 끌어안고 가기 위해서 몸을 돌보기로 또 한 번 다짐한다! 

프랑스에서 온 영화 소식

 그러다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작년 여름 만난 샤를렌의 메세지가 한가득 와있었다. 지인을 통해 소개 받았던 프랑스인 친구로 한국 영화를 좋아해 이런 저런 일로 잠시 들렀다가 한차례 만남을 가졌었더란다. 무척 무더운 날이었고 단 몇 시간이었지만 이후 대게 먼저 안부를 전해와준다. 한국말이 워낙 유창했기 때문에 그녀의 품성을 알아차리는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오늘은 본인의 첫 단편영화 촬영 현장 스틸과 감상을 보내왔다. 스틸 몇 장만 나란히 두고 보아도 좋은 빛과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져 참 좋았다.

스쿠터 못 사면 헬맷만이라도 살까

 저녁에 ㅇ언니를 만난뒤 스쿠터를 얻어(!) 탔다. 바람이 제법 찼지만 그 덩치에 작은 혼다 스쿠터 뒷자리에 몸을 구겨넣어 동대문구 일대를 도는데 참 근사했다. 10여년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세상 천지에 동경하는 모든 것을 차지하던 언니다. 고등학생인 애를 옆에다 데려다놓고 담배를 맛나게 피어대며 술을 사주던 언니. 그리고 이상한 극장에 데려가주었던 언니. 무엇보다도 빨갱이었던 언니.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까불거리지 않았었냐고 묻자 "아니, 너 되게 깍듯했지", "너가 내 사진 프린트해서 수첩에 편지 적어준 것도 있었어. 너 그렇게 아기자기한 애였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곤 솔직히 깍듯하진 않았다며 웃는다. 편지 적어준 것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요즘 들어 기억력의 감퇴를 부쩍 느끼는데 결국에 거슬러 남게 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싶네.

 며칠전 친구에게서 들은, 전 직장에서 부당하게 부하직원을 모욕했다던 말도 안되는 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상처로 남게될지를 가늠해보다가 정신이 아찔해졌다. 우리 둘은 내 부모가 어디 가서 그런 대우를 받을까봐 무섭다고 입을 모았다. 늘 염두에 두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린 왜 항상 속는 기분일까

 항상 속는 것이지만 4월의 봄은 아직 춥다. 언니는 '아닌데. 나 작년 4월에 반팔 입고 다녔는데'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린 왜 항상 계절에 속는 기분일까'. 어제 늦은 오후에 집을 나서는데 옷차림을 제법 여러겹 챙겨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늘한것을 느끼니 작년 영국에 도착했던 날이 생각났다. 소문난 영국의 날씨가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변덕스러울 줄 몰랐던 난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갔다가 비바람으로부터 환영 인사를 흠씬 쳐맞았기 때문이다. 도착한 첫 날 시차적응을 못하고 침대 시트에 런닝 반바지와 맨다리를 바스락 바스락 비비며 잠을 설쳤던게 좋았던지라 요즘 그 때 기분을 내보려 전기장판을 켜놓고 일찍이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새벽 5시 40분 / 6시 15분 / 6시 30분 / 8시에 연이어 잠에서 깨버렸다. 핸드폰을 머리맡으로부터 멀리 치워야 할 거 같다.

고스트 월드 만세 스티브 부세미 만세

 엄마가 차려준 생일 상을 든든히 먹고나서 간만에 랜시드를 듣고 있으니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들긴다. 우리집에 좀처럼 방문하는 이가 없기로서니-그것도 이른 아침에-순간 겁을 먹고 볼륨을 낮춘다음 내다보니 중년의 여성이 복도 계단에 앉아 성서를 큰 목소리로 낭독하고 계셨다....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인데 그러던 중 대학 시절 유일하게 랜시드를 좋아한다는 공통 분모 하나로 친해졌던 선배에게 몇 년만에 잡은 약속과 관련해 연락이 왔다. 여기서 내가 머리를 초록으로 염색하고 바이닐 수집하는 이웃집 아저씨 아니 스티브 부세미랑 자면 완벽하게 고스트 월드인데! 아. 어젠가 며칠전 <고스트 월드>의 작가가 새 작품을 내놓을거라는 소식을 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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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미 뱀파이어의 나이로 들어섰으니 죽어도 안 죽은셈 치자하던 우리의 올리베이라 

 이상한 일이다. 그의 영화만큼이나 이상하다. 비오는 밤 즐겁게 술자리에서 웃음을 흘려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또 한 번 거짓말 같은 부고를 접했다. 여전히 기분 좋은 흥에 취해있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년전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만났을 내게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감지했었다. 꽤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그 영화의 이미지들이 기억 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렇게 작년 그의 영화들을 한데 모아 틀어준 서울아트시네마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 미셸 피콜리 할아버지가 위스키를 연이어 주문하던 것처럼 이따금씩 좋아하는 술을 찾아 마시거나 건배를 할 때에는 노년의 세브린느와 마주 앉아 그랬던 것처럼 그를 두고 초를 켜는 날이 여럿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은 어느 시대의 죽음이기도 할텐데 이를 두고 어떻게 발화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영화가 환영이라면, 만져지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에 도달해 결국 손을 바삐 움직여본다. 죽음이라고는 하나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마음으로만 그려보게 될 낙원상가 옥상의 허름한 극장에서 그의 영화들을 보았던 기억. 그와 이 곳을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앞으로 남게될 것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낙원상가 4층 서울아트시네마 

 ‘이 곳을 어쩌다 간간히 찾아왔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어렵지는 않았을까’라는 소용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옥상' 있는 영화관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어마어마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게 거대한 신기루였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트시네마는 그만큼 내게 이상한 열병같은 곳이다. 아마 17년 째 살고 있는 집을 떠난다해도 지금과 같은 마음만큼 그리울거 같진 않다.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수많은 환영들에 사로잡혀 하는 말이겠거니 짐작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지난 20대의 절반은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낙원을 만남의 광장 삼아 친구들을 만났고, 정처없이 헤매이다 겨우 안착해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숙면을 취했으며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요동들을 겪었다. 친구들과 마지막 상영일 날 옥상에 모여들어 마치 초상집 분위기 같다며 깔깔깔 한참을 웃어댔지만 상영 전 극장의 불이 꺼지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여느 때면 맨 앞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눈에 가득 채우고 봤겠지만 그보다도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상영이 끝난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어느 때보다도 대책 없이 아름다웠고 진 켈리의 미소 하나로 3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취해버렸다. 다행이 초상집보다도 졸업식과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 내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고 옥상에 나와 담배를 피며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을 반겼다. 낮에는 옥상 계단에 앉아 처음 이 곳으로 데려와줬던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책임을 물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지 이 곳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겠지만 첫 만남이 언니와 함께였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벌써 그게 8년 전의 일이다.

 해질 무렵의 옥상에 모인 사람들은 난니 모레티 영화의 엔딩 같았고 흐릿한 밤은 아벨 강스의 어느 영화에서 단원들이 마을을 떠나며 손을 흔들어주는 장면의 초월적인 공간 같았다. 김홍준 감독님이 마지막 상영 전 날 말씀하시던게 자꾸 마음에 남는데 어쩌면 10년 이내에 필름으로 영화를 본 경험이 없는 세대가 속출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것 같았지만 옛것을 고집하는 구 세대들의 회포라고만 하기엔 그 날, 그 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목격자들은 너무도 많다. 한 두명이 아니라서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치열하게 돌아가는 필름 너머로 관객들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채울 것이고, 이 목격담은 언제 어디서건 발 없는 유령처럼 발견될 것이다. 오래 앉아있기에는 허리와 목이 너무 아프고 조금만 여차하여 자세를 뒤틀면 잠에 빠지기 일쑤거나 누군가의 시야를 가렸을지도 모를 그 300석으로부터 떠나와서 말이다.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 낙원은 이제 기억에만 남게 되겠지만 우리는 안다. 이 이상한 우정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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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rewind 2014. 12. 27. 22:36

 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다같이 어렵게 모인 자리를 애-써 뒤로 한채 집으로 돌아왔다. 식을 올리기 며칠 전 청첩장을 주고자 만났던 그녀는 집에 자기보다 큰 냉장고가 오늘 들어왔는데 그걸 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몰랐더라는 이야기를 조근조근 내뱉었었다. 아직 살림살이가 채 모두 들어오지 않은 그 방에 새하얗고 작은 언니와 냉장고의 모습을 나란히 그려보는데 그게 참 낯설지만 설레고 좋았다. 모두가 입 모아 말했던 것처럼 정말 이 사람만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은게 그녀였다. 그녀를 닮아서인지 모여든 친구들 모두가 어여쁜 미소들을 흘려댔고 아침 댓바람부터 몸살 기운에 악몽을 내리 꿨던 것도 잊을 수 있었다. 결혼한 이들이 신랑 신부를 데려다놓고 함께 얘기하는 유부 토크라는 재미난 자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의 말이 참 기억에 남는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고 싶은게 당연한거다. 결혼이 좋을 때는 참 좋은 거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말고 편하게 그 흐름을 따라라'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잘 살고 싶어진다.

 31일이 마감 기한인 일을 마치기 위해서 터덜터덜 뾰루퉁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만원 전철인 분당선에 몸을 밀어 넣었는데 무리해서 타려고 했던 어느 승객의 손목이 문 사이에 낄뻔 하여 그것을 붙들고 한참을 있었다. 주머니에 넣었던 양손을 빼낼 틈도 없이 그대로 인산인해에 갇혀버렸는데 순간 머릿속으로 이 생각이 지나갔다. '아. 이런게 너무 힘들고 싫어서 직장을 그만둔거였는데...' 그런데 여전히 어려움은 지속된다. 운이 좋게도 일거리는 끊이지 않고 들어오지만 생활의 균형을 잡는데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이 균형은 줄곧 위태위태할 것이다. 그치만 분명 좋은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감수하는 것일테지. 지금 이 시간에는 집에 돌아가 일을 해야겠지만 이를테면 오후 3-4시 사이에 해지는 시각 길을 걸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누리고 있지 않나. 나이 들어가며 알겠지만 모든걸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내 스스로 선택을 함으로 최대한의 군말들을 아낄 뿐이다. 

선택인 것을 진짜 믿을 수 있게 되면 괜한 짓이 줄어들고, 지금에 감사하게 되고, 그러면 가깝고 편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집중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요즘 이 말만치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다. 물론 믿기까지 군말들은 여전히 다닥다닥 달라붙는다만.

만원 지하철에 기가 모두 빨려나가기 직전 내릴 준비를 하며 왼쪽 문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는데 등쪽으로 누군가의 손길을 느껴졌다. 어느 아주머니가 "내릴거에요?"라고 물으며 몸을 들이미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네. 그런데 만지지 말아주세요"라고 굉장히 힘없지만 분명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깜짝 놀랐고 아주머니도 놀란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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