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들을 기록을 통해 그 면면을 포착하거나 붙잡아 두고자 한다. 아내를 홀로 둔 채 망망대해로 떠나와 있는 폴은 하루 8 시간 가량을 흔들리는 뱃속에서 기계와 씨름해야하는 화물선의 선원이다. 별안간 배를 이탈해 리스본의 한 항구에 내린 그는 쉴 새 없이 8 미리 카메라로 자신과 주위 풍경의 모습을 담아간다. 이것은 아내에게 영상 편지로 전달되어 스크린으로 다시 영사된다. 좀 전에 본 낯익은 모습들이 8 미리로 촬영된 것을 다시 볼 때 우리는 그와 함께 동행하며 도시를 거닐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백색도시>는 바로 이 남자와의 언제 끝날지 모를 동행이다. 일상 속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찾아올 지 모르는 감정들의 여백에 대해 생각하며 그를 응시하게 되는 것. 기약 없는 이  여행객은 누군가들의 일상 속에 몸을 내던진다. 춤을 추기도 하고 주먹질에 얻어 맞기도 하며 하물며 소매치기까지 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여자를 만난다.

 폴은 백색이 곧 고독이라고 말한다. 백색은 모든 것에 흡수되버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빛으로써 그것들을 잠식시킬 수 있는 힘도 지니고 있다. 여자는 사랑에 빠져들다가도 지금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어딘지 끊임 없이 재차 돌아본다. 늘 느긋하게 웃어 보이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불안은 돌고 돌아 결국 그가 방문자란 사실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실제로 화물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감독이 담아낸 리스본의 풍광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쓸쓸해보인다. 영화의 첫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푸른 물결이 안개에 가려져 있는 가운데 아득히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뒤에 한 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여자의 몸은 광활하며 바다와 같다는 말을 남긴채 그는 어디론가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바다만이 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색도시>는 이 기억들을 어루만지며 놓치지 않기 위한 모든 '방문자'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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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영화

rewind 2012. 8. 23. 02:07


 동네 카페에서 자리를 잡아 졸업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내가 있던 구역이 마감할 시간이 되었다고 하여 주문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왔는데 갑자기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초,중학교를 함께 나온 한 때는 둘도 없는 사이라 생각했던 친구다. 굉장히 반가워하는 기색에 나 예뻐지지 않았냐며 여기서 무엇 하느냐고 묻는 그 아이. 그 때처럼 여전히 당차고 거침 없는 말투를 지녔다. 멋쩍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나는 그대로지?"라고 물으니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는 이어 "살이 너무 많이 쪘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하자 작가냐며 묻는다. "어, 아니 아직 학생이야. 졸업 영화 준비해." 대뜸 양 손으로 하이 파이브를 청하더니 열심히 하란다. 그리고는 언제 한 번 같이 밥을 먹자며. 지나 온  '관계'를 두고 이전 같지 않은 마음과 상황들에 대해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의 시각과 장소의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지. 마치 내가 키보드로 적어 나가던 글에서 튀어나온 상황 같음에 쓴 웃음을 흘렸다. 아마 그 친구와 난 함께 밥을 먹을 일이 없을 테지. 카페 안을 온통 너털웃음으로 채우던 그 친구는 그렇게 오빠들 무리와 함께 기척 없이 사라지고 없다. 밴드 Gong의 노래들을 2시간 반째 반복해서 듣고 있다.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떼워 그런지 허한 속을 음악이 채워주고 있는 기분이다.

2012년 8월 23일 새벽 2시


- 오늘은 2학기 수강 신청을 했다. 이렇게 여름방학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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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지하철, 1980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극장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고 영화가 시작되는데 왠지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 지하실에 갇혀 지내야 했던 남 주인공에 대한 어슴푸레한 기억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에서도 비가 내렸다. 마치 상영관 위층으로 올라가면 까뜨린 드뇌브가 좀 전의 연기가 어땠느냐며 물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상영이 끝난뒤 일전 이수에 있던 극장에서 <누들>이란 영화를 봤을 때의 기억이 올라왔다. 꼬마 남자아이가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 트렁크 가방 안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더란다.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뒤 텅 빈 상영관에 앉아 있는데 문득 내가 트렁크 가방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무한히 샘솟는 희망을 안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 <마지막 지하철>은 보고 나자 극장 안이 엄청난 고독감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언젠가 집에서 조그만 모니터로 보았던 영화와 동일한 것이라기엔 감흥의 여파가 너무도 다름에 또 한 번 놀랐다. <이웃집 여인>의 경우 연소해버린 잿더미 속 같았다면 이는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불길함으로 인해 스크린 너머에 미처 꺼뜨리지 못한 혹은 꺼뜨릴 수 없는 불씨를 두고 극장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연극 연출가 뤼카 스타이너(헤인즈 베넨 분)는 남 배우 베르나르(제라르 드빠르디유 분)에게 아내 마리옹(까뜨린 드뇌브 분)이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이 있음을 첫 만남에서 넌지시 대화를 통해 전한다. 내내 흔들림 없이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마리옹이 남편 뤼카가 거처하고 있던 지하실을 독일군이 수색하려 하자 베르나르에게 도움을 청한 때다. 붉은 화장과 옷에 흐트러짐 없는 머리와 눈빛으로 무장한 그녀는 남편의 빈 자리를 대신해 굳건히 극장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남편에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마음 속으로 불안과 처절히 싸우고 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인다. 앙트완 드와넬 연작에서 보여진 트뤼포 감독에 대한 인상은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상황들을 유희하듯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지하철>을 포함해 <이웃집 여인>, <부드러운 살결>과 같은 작품에서 그는 놀랍도록 감정의 결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끓는점 직전까지 치고 올라가는 그 여정을 보노라면 정말 경이로운 감정의 환희를 앓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메리카의 밤>에서 촬영장 곳곳에 상주하고 있는 뜨개질 할머니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계산 하에 두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배우들의 호흡에 맡긴 부분이 더욱 큰 것인지에 대한 여러 궁금증들 때문이다. 만일 과거로 돌아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나 혹은 그 도처에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면 트뤼포 다음으로 최근 들어 역시 이러한 의문들로 나를 자극 시킨 자크 로지에 감독에게 <오루에 쪽으로>의 연출 비화를 묻고 싶다.


 다시 <마지막 지하철>로 돌아와 마리옹이 감춰왔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을 꼽아보면 베르나르가 레지스탕스를 위해 떠난다며 짐을 챙기던 때다. 아마 그 전에도 둘 사이의 미세한 제스쳐들이 몇 차례 있었던 걸로 짐작한다. 예로 그가 여자들의 손금을 봐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옹의 곁눈질 시선 등이 그러할테다. 지하로 새나가는 남편의 귀동냥 없이 온전히 둘만 방에 있게 되면서 처음으로 밀회를 즐긴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재회하게 된 둘. 배경은 병원으로 베르나르는 부상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극장을 떠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는 여인을 옆에 두고 텅빈 눈빛을 띄고 있다. 이전의 모습은 간데 없이 비로소 둘만의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애정을 구하는 마리옹. 그녀가 남편으로 추정되는 이의 부재를 전하는 순간 나와 관객 모두는 이제 새로운 연인들의 앞날이 시작되는가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뤼카가 연출한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생각해 볼 여력도 없이 지상으로 올라 온 뤼카가 무대 위로 올라 관객들에게 소개되고 박수를 받는다. 여기서 마리옹은 잠시 주춤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양 손을 잡고 인사를 올린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감정이 있음을 인지했던 상황, 그러니까 지하에서 지내던 중에 쓰여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이 좀 전의 우리가 착각할 뻔 했던 모습인 것이다. 800여 일간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할 지라도 수 만번이고 엄청난 고독과 싸우며 무너지는 과정을 온 몸에 아로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박수 치며 환영하는 뤼카의 모습은 너무도 말쑥하며 그 누구도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가늠해보기 힘들다. 아내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당사자 앞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말한다는 것은 본디 뤼카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도 있을 지 몰라도 이미 수 차례 그의 상념들 속에서 손으로 지면으로 그리고 무대 위로 향할 준비를 하며 떠나가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이 감정의 누수를 목도한 순간 <마지막 지하철> 또한 파국을 향하는 <이웃집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들은 과연 마지막 지하철을 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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