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rewind 2012. 11. 5. 17:07


요즘 들어 이 순간이 미친듯이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붙들고 싶어서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런데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 이 순간을 영원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직감. 심해 어딘가에 잠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는 오히려 안 춥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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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의 햄버거

rewind 2012. 11. 1. 22:49

<Andy Warhol eating a hamburger>

미리 준비해 놓은 케챱통이 눈에 들어온다. 패티와 빵 사이에 뿌리지 않고 찍어먹는 모양이 왠지 그의 고집인냥 느껴진다. 어렸을 때 피자를 케챱에 찍어먹는 나를 보며 어쩜 그리 외삼촌과 똑같냐며 얘기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삼촌의 키는 약 185, 나는 176이다. 돌이켜 보면 초등학생 때 케챱을 참 많이 즐겨 먹었다. 고슬고슬한 밥 위에 올려진 계란 후라이. 거기에 오뚜기 케챱을 찍찍 뿌린뒤  김치라도 한 점 올려 먹는 날이면 정말 횡재한 날이다. 키 크고 싶으신 분들은 이 케챱에 성장판의 비밀이 있을 지도 모르니 한 번 시도해 보시길. (그리고 입 안에 혓바늘 났을 때 케찹 먹으면 심장이 벌벌벌 떨린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찰진 밀크 쉐이크에 뜨겁고 짭쪼름한 감자 튀김을 찍어 먹는 걸 무척 좋아한다. 롯데리아도 아닌 맥도날드여야 한다. 롯데리아의 쉐이크는 찰기가 덜하다. 채식을 시작한 이후로는 밤새 술을 부어 마시고 첫차를 기다리는 정류장 즈음으로 가끔 들리기만 하는 패스트푸드점. 뭔가 섭섭하니 올해가 가기 전 쉐이크후라이를 한 번 먹으러 가야겠다. 기왕이면 창가가 큰 곳으로. 혜화 맥도날드 2층에 가 넓고 커다란 횡단보도 위 행인들을 구경하며 먹는 것도 좋으리라.

영상에서 보여지는 바에 의하면 앤디 워홀은 햄버거(와퍼)의 맛을 음미하며 먹는 다기보다 도려내거나 조각 내어 입 안으로 집어 넣는 느낌이다. 담담한 표정 가운데 이따금 마주하게 될 대상(관객)과 시선을 마주칠 때면 그 즉시 피해버리는데 여기서 예상치 못했던 감정이 도출된다. 이 자가 분명 오늘 나와 식사를 한 뒤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거 같은데 그 발화의 순간을 피하는 듯한 인상.

일종의 의식인냥 와퍼를 다 넣은 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내뱉고 사라진다.

"내 이름은 앤디 워홀이고요. 난 방금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무언가를 기대했는 지 몰라도 나는 이내 마음이 서운해진다. 그리고 나도 햄버거는 아니지만 음식을 먹을 줄 알아라고 대꾸하고 싶어진다. 뭐 나는 그렇게 느꼈다고 치자.

이것은 워홀이 아닌 Jørgen Leth라는 덴마크 영화감독의 제안에 의해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66 scenes from america>라는 영화의 장면 중 하나로 햄버거 먹는 장면을 워홀에게 제안했으며 그는 흔쾌히 이에 응했다고 한다. Jorgen은 그의 캠벨 수프와 같은 특정 브랜드들에 대한 고집을 미루어 볼 때 조수가 사다 놓은 햄버거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맥도날드는 없냐"고 물었고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지칭했다 한다.

"All the Cokes are the same and all the Cokes are good. Liz Taylor knows it, the President knows it, the bum knows it, and you know it."

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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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rewind 2012. 10. 15. 19:50
 

 5회차로 예정되어 있었던 학교 후배의 졸업 영화 촬영이 무사히 4회차로 마무리 되었다. 붐 마이크를 들고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따라 뒷걸음질 치는데 길가에 스며든 새벽 공기가 몸의 이곳 저곳에 옮겨 붙더니 결국 경미한 감기 몸살에 걸렸다.

 철도길 옆에서 노을을 맞으며 마지막 씬 촬영을 하는데 난니 모레티 감독의 <빨간 비둘기>가 생각났다. 매해 부산을 찾을 때마다 서울역에서 마주하던 풍경에서 <가족의 탄생>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듯 언젠가 나도 영화에서 등장인물을 모두 한 데 모아 내가 손 흔드는 모습으로 마무리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1시경이 되어서야 뒷풀이를 하러 돈암에 갔다. 닭한마리 집에 들어가 모두가 소주를 한 잔씩 기울이는데 그 앞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두 어 시간이 지났을까. 다들 노곤한 몸에 취기가 찾아 들어 웃음을 흘려댔다. 종필 선배를 두고 양조위를 운운하는 이들에게 눈을 째렸다. 새삼 체감하는 것이지만 결국 영화라는건 내가 가보지 못한,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이들의 삶을 엿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끄럼 많은 줄로만 알았던 후배가 연출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들을 감지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황홀했다. 매일 밤 촬영이 끝나고 집에 들어 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미미한 소음이 찾아들 때마다 머릿속으로 "아, 잠시만요"라는 말이 불쑥 찾아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액션"을 외쳐주기를 기다리다 한참을 잠을 설쳤다. 

 그리고 얼마전 내 시나리오를 두고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코멘트 해주었던 어느 선배의 말과 벨라 타르 감독의 인터뷰 글을 함께 떠올렸다. 부산을 다녀온 뒤 지속적으로 날 지탱해주고 밀어 붙이는 생각은 내가 지나 온, 믿었던 영화들에 대한 확신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지의 영화들에 대한 꿈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영화의 소품으로 사용되었던 꽃다발 두 개를 품에 한 가득 안고 있으니 기사님께서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신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내리게 되는 상황에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던 차에 아저씨의 보물 1호인 LP 1천 장에 대해 전해 들었다. 갑자기 또 신이 나 밤 산책을 더 할까 했지만 택시비가 없어 마음을 접어야 했다. 꽃다발 하나를 건네드리니 내일 아침 아내가 식탁에 놓여있는 걸 보면 좋아하겠다며 기쁘게 받아주셨다. 이렇게 그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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