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것들

rewind 2017. 8. 10. 16:06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지난 며칠은 무서웠다. 감정으로서 무서운게 아니라 그냥 인지되었다. 조금씩 넋을 잃었던 정신이 돌아오고 있고 어제 갑작스런 친구의 부름으로 작업실에 있다가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인생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맥락의 질문을 그는 던졌다. 낮에만 해도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다가 잠든 나머지 의사가 볼을 톡톡 두들기며 '설마 주무세요?'하던 반 수면 상태의 나였다. 먼 여행을 앞둔 또 다른 친구의 짐 싸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내 감각이 없다가 조금씩 3년 전 2개월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나를 떠올렸다. 끊어졌던 맥락이 다시 살아난듯 했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 그녀에게 정말 실감이 안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던 기억 속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다시 끌어냈다. 구글 드라이브에는 당시 여행을 앞두고 챙겼던 준비물들의 목록이 있었다. 그녀는 신발 네 켤레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신발들이 만나게 될 땅의 촉감들을 그려본다. 언니는 많이 걸어다니니 아무래도 한 두 켤레로는 신발들이 무리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이 저녁식사를 할 즈음에야 정신이 제법 돌아왔다. 저녁에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제법 또박또박 문장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그제만 해도 방향을 잃은 낚싯대마냥 허공을 둥둥 떠다녔는데 실체들 앞에서 조금씩 다시 살아났다. 다시 말하는 법을 배우고 표현할 줄 알던 것들을 몸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상대를 위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곧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어떠한 대우를 받았으면 하며 어떠한 것들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는 것. 나는 스스로가 매우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정말 좋았고 안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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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rewind 2017. 7. 11. 22:00

텅 빈 거 같았던 그 때와 지금의 시간. 스스로에게 무엇을 가장 해주고싶은 지 그리고 찾아다니고자하는 지 (띄어쓰기 너무 어렵다..) 사진들을 보며 떠올렸다. 나는 한없이 푸르게 펼쳐진 시내의 그 공원들이 너무 좋았고 후무스와 샐러리 그리고 각종 종류의 요거트와 말린 과일들을 마트에 사다니는 것을 좋아라했다. 어떤 날은 특별한 일정 없이도 무작정 가보지 않은 동네의 마트에 가서 달걀 한 판 사오는 것을 임무처럼 완수하기도 했다. 한국에 오기 전 2주 가량은 달걀 한 판과 감자 1Kg로 버텼으며 일주일 조금 안되게 머물었던 벨기에에서는 커다란 깜빠뉴와 감자샐러드를 매일 아침으로 때웠다. 어느 성당에 들어가 졸다 나오기도 했으며 말도 안 통하는 파리 시내 중심에 있는 수영장에 가 혀꼬인 남자도 만났다. 먹고 걸으며 온 몸에 바람을 스치고 마음이 살랑살랑. 누가 뭐래도 나는 여름밤이 좋아좋아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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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여성과 동물의 이미지에 대하여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⑤ 혐오의 연결고리, 여성과 동물
2017.06.27 17:59:56

얼마 전 일본 앞바다에서 불법 포획되어 10여년간 돌고래쇼에 동원된 '태지'의 향후 거처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함께 지내던 돌고래들이 자연으로 방사되면서 종이 다른 태지만이 동물원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지는 우울증 증세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자살 시도를 반복했다. 동물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들이 불법으로 잡혀 온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누구도 그들의 고통을 구경하고자 부러 쇼를 관람하고자 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돌고래를 좋아해서 직접 보기 위해 쇼에 갔을 뿐인데 이걸 '혐오'라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했던 경험을 두고 혐오란 무엇인지 사회에서 여성과 동물을 두고 소비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둘의 연결고리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국내에서의 '동물 보호 운동'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장 대중적인 캠페인은 아무래도 유기동물 입양 캠페인이다.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사지말고 입양하세요'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반려동물 사랑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호감을 사기 마련. 그러나 오랫동안 국내에서 '동물 보호'를 한다고 하면 '개나 고양이를 유난스레 좋아하는 사람들' 즉 동물 애호가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해양 동물 보호 단체나 해외 단체들의 국내 지부 또한 생겨나면서 동물 보호 운동의 범주가 전보다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큰 성과다.('시 셰퍼드(Sea Sheperd)'라는 해양환경동물보호단체는 얼마 전 내년 출범을 목표로 한국 지부 설명회를 가졌으며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Humane Society International)은 몇 년 전 부터 한국에 지부를 두고 식용으로 길러지는 개들을 농장에서 구출해 해외로 입양 보내는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소젖 섭취가 인간이 비인간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착취, 억압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라는 모임도 생겨나 먹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채식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풍부하게 다루어 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다.  


반려동물, 실험 동물, 야생 동물 이외의 범주에는 우리가 동물원이나 관광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쇼 동물 그리고 빠르고 많은 먹거리 공급을 위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으로 길러지는 농장 동물 등이 있다. 범주의 기준을 살펴보면 대개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들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동물을 두고 강요하거나 소비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귀엽거나 혹은 맛있거나이다.

동시에 여성에게는 어떤 이미지들이 요구되는가. 미디어 속 엔터테이너 여성들은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동시에 애교를 겸비해야만 한다. 외모를 두고 강아지나 고양이에 비유하며 귀여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주체로서 존중 받기보다 대중, 대부분 남성의 입장에서 강요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결혼 적령기를 벗어나면 '임신'을 하기에 너무 늦은 '노처녀'라는 낙인이 붙기 마련. 동물들 또한 인간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한 평생 '출산'만을 하기도 한다. '작고 털이 빠지지 않는 종류의 개를 원해요'라고 하면 펫샵으로 오기까지 농장에서 그리고 이후 길거리에서 수 백마리의 생명이 낙오된다. (돈 주고 산 강아지,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보셨나요?인간 여성은 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남자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신과 출산을 요구 받는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남아선호사상을 두고 여태 이야기하느냐고 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그런 시대이다. 국가에서는 출산율을 높이겠답시고 가임기 여성 지도까지 만들지 않았었나. 결혼을 하기에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기에 적정한 연령은 없다.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한정된 프레임에서 동물과 여성에 대한 혐오는 다양하게 드러난다. '여성스럽다', '여자 같다', '동물적이다', '짐승 같다' 이 나열된 단어들의 뉘앙스를 짚어보면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 없다. 여성스러움 안에는 상대의 비유를 거스르지 않는 내에서의 순종적인 이미지가 숨어있기 마련이며 누구도 수치스러움을 내세우기 위해 '남성성'을 가져와 이야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남성답지 못함은 곧 여성스러운 것으로 치환된다. 

또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저지른 잘못을 '짐승'들에게 돌려버린다. 언행에 두고 반격 할 요량이 없기 때문에 손쉬운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영화나 소설에서 인물이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 하면 대부분은 이런 대사를 친다. '너는 나를 짐승만도 못하게 대했어', '그는 나를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팼어'와 같은 레퍼토리들 말이다. 일상에서는 만연하게 '개 같다'라는 표현도 쓰지 않나. 개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리고 짐승만도 못하게 대했다면 짐승은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것인지?

동물보호단체 PETA에서는 'I'd rather be naked than wear fur'라는 캠페인으로 많은 여성단체들로부터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고 말겠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셀레브리티들이 누드로 나서기 시작한 것. 그러나 이 메시지 이전에 우리에게 1차로 노출되는 것은 벗은 여성의 몸이다.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있어 이 이미지가 매체에서 '상품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모피 시장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엔 '누가 벗었다'를 두고 먼저 이야기한다. 여성과 동물은 이렇게 전시되고 소비된다. 

더욱이 많은 뉴스에서 보았듯 동물에 대한 혐오는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잔혹한 사례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멀지 않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들은 어떤 대상이기 이전에 모두 각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동물권이 아닌 '생명권'. 우리는 이렇게 감수성의 범위를 더 넓혀가야만 한다. 혐오는 어떤 것을 맹렬히 밀쳐내는 것만에 해당되지 않는다. 알고 싶지 않다는 데에서 혹은 단순히 싫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폭력이야말로 곧 '혐오'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 여성과 동물은 이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필요가 있다. 단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만이 다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삶'이란게 있기 때문이다. 


(필자 최미연 씨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활동가로 일했었습니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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