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사이 딸애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 버린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뭔가를 바로잡아야 할 시기를 바보처럼 그냥 흘려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한 거라곤 연단이 올려다보이는 이곳에 앉아 남들이 엿들을지도 모를 말들을 가만히 손으로만 매만지면서 침묵을 키운 것뿐이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이제 나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 주인이 없는 말들.

김혜진, 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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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고양이들이 그렇듯 우리가 그들을 찾아간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귀여운 생김새로 막 작업실을 얻은 성인 여성 넷의 마음을 흔들더니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먹을 것을 내놓게 만들었다.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는 친구는 총 다섯이지만 당시 한 명은 먼 여행길에 떠나있었다.) 예정에 없던 내 자리 옆 창가 문은 곧 그들의 출입구가 되었다. 애초 영상 편집을 위해 모니터 한 대를 더 둘 것을 염두하며 티테이블로 쓰던 것을 가져다 확장한 자리였지만 보기 좋게 캣타워와 급식대로 변모하고 말았다.


첫 한 두어 달은 창문 앞에서 건네주는 사료를 먹고 그릇을 꺼내려 손만 뻗으면 부리나케 도망가기가 일쑤였다. 길고양이고 혹여나 혐오하는 이들로부터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손을 타지 않는, 내외하는 사이로서의 거리가 필요하리란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품에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들면 어쩌려느냐며 걱정하는 지인에게도 우리는 단지 밥만 주고 받는 사이일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리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납득되진 않았다. 짧게나마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집 베란다 밖에 찾아오는 동네 야옹이들에게 밥을 준 지도 어연 5년이 넘었다. 오면 오는 가 보다란 마음으로 이름도 붙이지 않는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단체를 그만두면서 지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긴- 시간 그들을 돌보자는게 나와의 약속이었다. 작업실 동료들은 어느 날부터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고 일종의 철칙을 갖고 있던 나로선 마음이 덜컹했다. 마음 먹고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으로 버텼지만 그래봤자 매일 찾아오는 네댓 마리를 보며 이미 붙여진 이름을 지워내기란 어려웠다. 한 마리, 한 마리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면서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고양이들은 이 곳을 다시 찾지 않거나 못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친구들을 보며 나만은 의연해야지란 생각으로 표현을 아끼기 시작했다. (표현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한 30장 찍으면 그 중에 3장 정도만 공유하는 식으로 균형 아닌 균형을 잡아갔다.) 초반 몇 주, 몇 달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행동 거지 하나 하나에 시선이 붙들리고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3, 4개월 차가 되니 고양이들도 우리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출근해서 문을 열면 창문 가로 돌진하듯이 달려왔다가도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아, 우리 이런 사이 아니였지'라며 순간 주춤하기를 내내 반복하면서도 그 순간이 매일 새롭고 재밌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도심에서 작고 귀여운 짐승들이 지들 헤치지 않고 챙겨주는 줄 알고 시간만 되면 찾아와 창가 앞에서 ‘야옹, 야옹' 울어대는 것도 늘 익숙해지지 않고 신기하며 마냥 고마웠다. 동료는 겨울 채비를 위해 기존에 만들었던 고양이 집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인터넷으로 스티로폼 상자 큰 것 2개를 주문했다. 친구들의 마음 덕분에 몇 주전 새끼들이 터를 잡은 것을 보고 안심한 것인지 무리를 떠난 어미 고양이를 제외한 새끼 셋은 그 안에서 첫 눈을 맞이했고 영하의 한파 날씨도 무사히 잘 견뎌내주었다.


팔불출 마음에 SNS 등지에 그들의 사진과 영상을 뿌린 것을 보고는 고마운 귀인들이 사료를 포댓 자루로 보내주거나 일부는 찾아와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들도 안 갖고 노는 것이라며 장난감과 방석 등을 챙겨다주기도 했다. 처음엔 손바닥 한 줌만했던 것들이 지금은 기지개를 쭉 피면 그 길이가 제법 4-50센치에 달하는 어엿한 청소년 고양이가 되었다. 몇 차례 설사를 한다거나하는 고비가 있었지만 한파도 곧 지나갈 것이고 이제 곧 녹은 눈들 위를 뛰어다니며 꼬질꼬질하고 축축해진 그 작은 발바닥으로 작업실 바닥을 더럽히는 일만 남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요 근래 들어서는 언제고 올 지 모르는 이별에 대한 경계심을 놓아두고 있었다.


새끼는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치즈 2마리에 검은 털을 가진 친구 한 마리다. 어미 고양이를 똑 닮은 삼색 성묘가 늘 붙어다니는데 우리는 그를 이모라고 부른다. 최근 들어서는 이모의 배가 눈에 띄게 불룩해진 것을 보고 비상 사태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아직은 그 어떤 확신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치즈 2마리는 덩치가 커지면서 장난도 그에 못지 않게 과격하고 훨씬 과감해졌지만 검은 털을 가진 친구는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당시 아트시네마에서 장- 피에르 멜빌의 회고전이 열렸고 우리는 검은(noir) 털을 가졌다고 해서 그를 ‘멜빌'이라 불렀다.


창문을 열면 늘 코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 앉아있었던 멜빌. 작업실 안에 두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겨우 내내 퇴근할 때면 고양이들을 창 밖 스티로폼 집으로 내쫓다시피 해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멜빌은 유독 추위를 많이 탔던지 가장 끝까지 버티곤했다. 요 며칠은 기력이 너무 없는 나머지 밥 먹으러 올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아 창을 넘어 지붕 위에 놓아둔 스티로폼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혼자 웅크리고 있었고 집채로 데려와 평소처럼 난로를 바로 옆에다 놓아주고 미지근한 물에 캔 사료를 섞어다 주었다. 그 날은 어찌나 힘이 없는지 평소엔 손만 다가가도 도망치는 아이가 내가 손가락에 물을 묻혀 입가에 갖다주는 데도, 몸을 쓰다듬어 주는 데도 가만히 있었다. 사실 그 때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나 보다. 지금에 와서나 짐작해 보건데 물 한 방울 떠마시지 못할 정도로 몸을 못 가누는 상태였다면 그 작은 몸집이 감당하기에 얼마나 아팠던 것일까. 이전에도 이따금씩 기운이 없다가도 곧잘 다시 괜찮아졌기에 그 날은 곧 지나가고 말, 유독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중 하나겠거니 했다. 늘 시야에 두고 살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상태의 심각성을 알기가 어려웠던 것이라고 자책을 조금이나마 거두어 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혹시나하는 불안이 늘 깔려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목요일 밤, 친구에게서 멜빌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전화를 받고 작업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지인에게 24시 병원을 묻고 혹시나하는 상황들을 생각해냈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건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서울 도심 내에서 움직이게 될 경로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댔지만 그 외에 것은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전화 상으로 친구는 말을 아꼈다.


나보다는 고양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경험이 많지 않은 친구들이고 ‘죽었으면..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방어해왔다. 그러면 상처를 덜 받을 것이라 생각했었나보다. 그게 아니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도심 한 가운데 그리고 임대해서 들어와있는 작업실이란 상황과 공간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해주는 것. 거기까지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양이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걱정해온 순간이 결국 찾아왔고 뭣보다 친구들이 받게 될 상처가 가장 두려웠다. 침착하고 의연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고양이의 행방을 묻자 스티로폼 집 안에 있다고 했다. 목장갑을 끼고 집 안에서 멜빌을 꺼내려고 하니 잠든 모습이 너무 곱고 예뻐서 원망스런 마음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몸이 굳은 정도를 보아선 잠든 지 몇 시간 밖에 안 지난 듯 했다. 그렇게까지 안 좋은 상태였는데도 다음 날 일을 핑계로 작업실에 들리지 못하고 (않았고) 줄곧 거리를 두어 온게 미안했다. 내가 재정적으로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어떤 순간이고 주저하지 않았을텐데.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땅으로 꺼질 듯이 슬퍼서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 친구 둘 앞에서 누구보다 더 차분하게 그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의지가 무너졌다.


나의 집 앞에 있는 24시 동물병원에 일괄 소각 처리를 부탁 하려 셋이 택시를 탔다. 멜빌을 담은 택배 종이 상자를 친구가 안은 채로 앞자리에 앉았고 내내 혹여나 냄새가 나서 택시 기사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마음이 쓰였다. 마음을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푹 잠겨버릴 것 같았다. 다른 친구는 겨우 내내 추운 작업실의 창가의 단열을 위해 샀었던- 그 쓰임새가 좋아 이후 시장에서 재구입했던 빨간색 다용도 테이프의 일부를 조금 뜯어 상자에 반창고처럼 붙여주었다. 그 테이프를 이런 때에 쓰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작업실에서 동네까지 택시는 요금으로 만 원이 채 안되는 거리였지만 그 짧은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멜빌을 처음 만났던 가을부터 귀여운 고양이들을 보겠다고 먹을 것을 사들고 왔던 개소식 때의 친구들. 어느 친구의 기타 연주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날도 있구나하며 그들도 나도 어떤 잠에 취했던 시간. 그리고 붉은 적외선 난로빛을 함께 쪼이며 보낸,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근래의 겨울 날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동물들이 있어 일괄 소각 처리를 맡아주기 어렵다고 했다. 길 동물 한 마리 묻어줄 곳 하나 마땅치 않은 도심의 척박함에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어렵게 일괄 소각 처리를 부탁하려 했던 것이었다. 작업실에서 멜빌을 상자에 넣고 정신을 차리자 그 시간에 우리가 갈 수 있는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전염성 등의 문제로 사실 묻어주는 것보다 소각 또는 화장을 하는 것이 더 옳은 처사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겨울이니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금에 와 해본다.)


늦은 밤 집, 단지 내에 흙이 덜 얼어있는 곳을 찾아 셋이 멜빌을 묻어주었다. 길고양이를 돌보아주는 사람도 적지 않은 동시에 작년 봄, 혐오 범죄가 일어났었던 동네인지라 혹여나 누군가가 지나가다 우리를 보진 않을까 내내 마음을 졸였다. 약 4개월간 밥을 주고 따뜻한 난로 온기를 쪼이고하며 눈을 마주친 시간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서둘러 묻어주어야만 하는 시간이 너무 애처롭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멜빌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두서 없이 써버렸다. 불과 몇 주 전에는 식탐이 유독 많은 멜빌이 혼자 먼저 와서는 밥을 다 먹고 치즈 둘이 먹을 때 또 달려들기에 손으로 잡아 올려서 품에 안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신기해 핸드폰으로 나의 얼굴과 함께 사진을 찍었었고 조금 지나지 않아 쏜살 같이 내 품을 달아났었다. 그 기세가 너무나 좋아서 오래 오래 봄 그리고 여름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었는데. 너무도 애석하게 무언가 해볼 겨를도 없이 단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친구의 말처럼 우린 여전히 고양이란 짐승에 대해 알 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짐승이란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너무나 특별한 존재라는 것임은 알지만 그들을 보살피기에 우리의 상황과 능력은 너무도 부족했다. 여전히 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지 그 균형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지만 분명한건 멜빌이란 사랑스러운 존재가 우리에게 잠시나마 찾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고마움을, 그 예쁨을 두고 두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단 하나 너무 아쉬운 것은 멜빌이 이 겨울을 지나지 못해 봄이면 흩날릴 꽃가루 내음에 재채기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 무지개 다리 건너 세상에서는 이번 생에 태어났던 도심 한 가운데보다 그런 꽃내음과 따뜻한 볕을 실컷 만끽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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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Arte Cinema 페이지에 올라온 인터뷰 영상 속 아녜스 바르다와 그녀의 고양이 니니의 모습

(https://www.facebook.com/artecinema/videos/10155990605610786/)



시네 타마리스를 방문해 니니란 고양이를 처음 만나 꾹꾹이를 받았던게 2014년 6월이었으니 그로부터 약 4년이 흐른 셈이다. 니니의 소식을 알게 되서 기쁘고 반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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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에년에 비해 휘파람을 더 잘 불 수 있게 되었다. 올해 기타를 다시 손에 잡게 된다면 그건 저 영상 속 벨로주의 아름다움의 절반이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일테다. 휘파람도 더 잘 불거야






이 곡이 왜 이리 귀에 낯익나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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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밍량

책갈피 2016. 1. 4. 23:04

Things like plot and genre are concepts that I want to subvert, but I can’t just be “a lone flower admiring itself” [i.e., take pleasure in work only by myself]. I want to be seen. That’s why I create constantly. The goal is to increase the likelihood of being 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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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책갈피 2015. 5. 11. 01:32

뒤돌아서면 절벽처럼 시간이 없어. 당장 화해하자. 당장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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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처럼 너는 다음 칸을 가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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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에 몸을 눕히고 기다리세요. 당신한테서 매운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칼을 들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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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2015. 5. 11. 01:28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어 볼까 하다가,

뻔뻔한 사람이 되어 볼까 하다가,

개망나니가 되어 볼까 하다가, 내 몸이 사막이 될 때까지,

내 피가 민물이 될 때까지 우는 일이 먼저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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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트시네마에서 있었던 '작가를 만나다'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를 두고 이용철 평론가와 정윤석 감독이 얘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운이 좋게도 친구 따라 서촌 갔다가 작년에 개봉 전 이 영화를 보았었는데 1년이 지난뒤 내게 남은 어렴풋한 기억은 연출자의 '집요함'이었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통과'해왔다는 사실을 배치해준 이미지들에 의해 깨닫을 수 있었고,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은 어디인가를 가늠해보게 한 것은 사실 오늘의 시네토크를 통해서였다.

 이야기는 영화가 개봉하게 된 시기에 세월호 참사 이후의 여파가 끼친 영향에 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여름에 흥행한 <명량>이 한 영웅을 앞세워 결국엔 모두를 '수장시키고 마는' 일종의 슬래셔 무비라고 짚어 얘기하며 한국 사회의 피로감이 해소되는 방식으로 연결지어 얘기하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슬프고 무서웠다. 나는 이 어마어마한 참사를 어떻게 껴안고 가야 할 지 사실은 아직 자신이 없지만 감독이 전해준 어느 관객의 리뷰에 대한 마음과 나도 같다고 말하고 싶다. 아트시네마 몇 년을 다니고도 시네토크를 녹음해본 것은 또 처음인데 그 대목을 옮겨보자면 :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망각하지 않고서는 살기 어려운 세상이에요. 그 죽음이 중요한 의미이고 용산이나 세월호는 정말 잊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 영화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잊고 있었던 (리뷰를 쓴 관객 친구 분의) 죽음을 어느 한 순간에 일깨운다는 그 사실이 감사했고, 그 사람한테 그런 시간을 만들어줄 수 있는 기능적인 역할을 해서 뿌듯했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되살려온다는 것.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나 또한 그 불편함을 다시 끄집어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에 마음의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굉장히 고마웠고 시네토크 내내 차분하면서도 분명한 그의 목소리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어느 구조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패치워크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관객의 인상에 대해 답하길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내러티브가 강화되면 될수록 선과 악의 구도로 갈 수 밖에 없어요. 관객들이 몇 년 후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시선이 가게 되는 부분이 달랐으면 했고요. 저에겐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을 볼 때마다 눈이 가는 인물들이 다르거든요."

"현대 예술가들이 다른 건 다 포기할 수 있어요. 토렌트에 내 영화 다 풀리고 돈 하나도 못 벌어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권력을 자기가 독점한다는 거거든요. 한국에서 스릴러 영화가 유행하는 데엔 이유가 있어요. 사회적인 폭력성말고도."

 그의 꿋꿋한 목소리를 들으며 '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용철 샘이 <논픽션 다이어리>가 개봉 당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며 더 나아가 대기업들이 소히 말하는 '다양성 영화'라고 일컫는 사업의 졸렬함에 대해 시원하게 말씀해주신 것도 매우 좋았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화를 내고 계셨지만 정말 이와 같은 영화가 잘되길 바랐으면 하는 그 진심 어린 마음이 너무도 잘 드러났기에 그 모습에 또 뭉클. 감독님이 본인의 '첫 영화 상영'에 대한 기억-그것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과 마지막 촬영 날 지존파의 무덤에 찾아가 비석에 손을 얹었던 경험에 대해 공유해주신 것 또한 무척 감사했다. 더불어 나는 여름에 파리에서 좋아하는 감독들의 묘를 찾아가며 비석에 손을 얹었던, '만져질듯한 감정들'에 대한 기억을 함께 떠올렸다. 이 분의 행보를 어떤 식으로든 항상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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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타지

책갈피 2014. 8. 10. 03:03

Hector: Mr. Hanna, what can I bring for you on this glorious afternoon?


Mark Hanna: Well, Hector here's the game plan. You're gonna bring us two Absolut martinis, you know how I like 'em, straight up.

[he gives Hector some money]


Mark Hanna: And then precisely in seven and one half minutes after that you're gonna bring us two more. And then two more after that every five minutes until one of us passes the fuck out.


[Jordan laughs]


The Wolf of Wall Street, Martin Scors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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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책갈피 2014. 5. 29. 23:43



밥 주는 길고양이에게도 이름을 안 붙여주는데 상근하던 당시 내가 처음으로 이름 지어줬던 '우주'. 한 쪽 눈이 우주처럼 유리 구슬 같이 예뻤고 항상 자기를 안으라며 짖는 모습이 여느 개와는 조금 남달랐던 아이. 우리 모두는 우주가 '본인이 원하는 것은 꼭 쟁취하고야 마는 자주적인 성격'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그냥 떼쓰는 것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 안아주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면 우주는 눈을 빤히 맞추고 짖기를 멈추곤 했다. 그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데 어디서 어떤 풍파를 겪으며 살아왔을 지는 몰라도 항상 좋지만은 않은 냄새로 피부병을 앓았던 그녀를 누구든 보면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참 사랑 받으며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얼마 전 좋은 가정으로 입양을 가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고 한다. 간만에 놀러온 사무실에서 찍은 위 사진. 눈에 띄게 좋아진 모습에 동료가 이런 힘으로 살아간다며 인스타그램에 코멘트를 남기었다.

이름을 붙여준다는 건 이미 내 마음이 하릴없이 상대를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라 주저해왔는데 '우주'야 네 이름을 불러보고 싶네.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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