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포드 연구 전문가라고 하는 미국의 비평가 '태그 갤러거(Tag Gallagher)'가 존 포드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부산 영화의 전당에 이어 서울아트시네마에도 찾아왔다. 범상치 않다는 그의 용모에 대해 미리 귀띔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상 위로 올라온 그를 보자 과연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70년대 히피족을 지나와 노년에 동네 바에서 매일같이 맥주 한 잔을 끼고 그레이트풀데드나 메탈리카를 들을 거 같은 옆집 할아버지 느낌. 그래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는데 그 흔한 팔뚝에 거미줄 문신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봤자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일련의 비평가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소개를 부탁하자 긴 설명 할 거 없이 준비해온 영상을 본 뒤 다시 만나자고 하는 그의 태도는 사실 조금 생경했다. ("I don't want to talk too much"라고 말하셨던듯) 내가 아는 또는 생각하는 비평가의 몇 안되는 이미지라곤 좋고 싫음이 분명한데에 주저없이 후두두둑 말을 쏟아내거나 정말 조근조근 생각을 풀어내는 사람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존 포드'를 좋아하는데다 그런 용모이시면 거침 없는 마초적인 느낌에 오승욱 감독님 같이 대번에 열변을 토해내실것만 같았는데 음, 어떤 온도의 사람이실까 궁금증이 일었고 조금 멈칫했다. 영상을 상영한뒤 이어진 자리에서도 그는 내가 기대했던 '달려드는 모양새'를 취하진 않았지만 때때로 소년과 같은 격앙된 목소리로 입을 모으곤 했다.

'말하는 모양새'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니 떠올랐는데 아까 아트시네마 로비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허문영 쌤이셨다. 순간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던게 '말투는 조근조근하지만 성량이 풍부해 멀리서까지 들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조근조근하다'라는 것은 목소리를 낮추어 차근한 모양새로 말을 풀어나가는 것인데 이게 또 큰 목소리로도 가능한거구나. 새삼 신기해서 한참을 귀기울여버렸다. 강연 전에 은경 언니가 태그 갤러거의 목소리를 두고 굉장히 조용하신 분이라고 말했었던지라 그에 더 신경이 기울었나보다. 원체 성량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는 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냐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요즘의 나는 적당한 데시벨의 목소리와 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의 지점을 찾고 있다. 나는 너무도 방정 맞다.

1시간 조금 안되는 시간동안 아-주 많은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드문드문 기억나는 이야기들이 몇 있다. 이건 그의 목소리 톤으로 직접 들어야 느낌이 더 사는데 그냥 혼자만 알고 있기엔 아까워서 말이다. 태그 갤러거의 목소리는 뭔가 심드렁한듯 하면서도 자신의 그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면 서운해하는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있다. 갈수록 점점 '확신에 찬듯'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오늘 같이 이렇게 귀여운 애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을 보긴 또 간만이다.

초반에는 마냥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대다가 후반에 메모했던 것을 옮겨보자면 어느 관객이 "존 포드 영화 중에서 혹시 싫어하시는 작품이 있으신지? 싫어하시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좀 덜 좋아한다던가 하는게 있으신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왜냐면 초반에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려워도 싫어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와 같은 식으로 말을 한 바 있었기 때문일터. 그러자 그는 "Why do you ask such thing?"이라며 투정 섞인 목소리를 낸다. 이어 궂이 말하자면 <도노반의 산호초>에서 스키 타는 장면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라고 하니 대번에 "No!"라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이 할아버지! 그 No의 뉘앙스는 마치 조카에게 '이모 이거 한 입만 주면 안돼?'라고 물었을때 싫어!하는 것과 같은 느낌. (난 또 혹시나 존 웨인이 여자의 엉덩이를 때리는 장면!이라고 말했더라면 순간 'Me neither!'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날뻔 했네.)

그리고 로셀리니와 존 포드에 대한 책을 쓰셨는데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게 있는지? "둘 다 카톨릭이다" (관객 좌중 웃음) "근데 이건 진지한거야. 둘 다 교회에 다니거나 하는 신실한 카톨릭은 아니지만 그 종교라는 것이 그들의 세계관에 어떤 영향들을 주었고 모두 역사에 대한 관심이 굉장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로셀리니 역시 무르나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어!"

앞서 보여주었던 영상은 그가 여태까지 직접 매킨토시로 편집하며 코멘터리를 덧붙였다는 존 포드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다들 하지 않는 건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근래 지혜언니와 함께 고민했던 부분들에 힘을 얻게 되던 순간! 

오늘 하스미 시게히코의 <오즈 야스지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그렇고 태그 갤러거를 만난뒤 새삼 '영화를 보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며 '비평'이란 것이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임을 새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그리도 호들갑을 떨면서 '싫다고' 짐짓 지나쳐버렸던 영화들을 다시 돌이켜 본 적은 있는 지에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 수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오즈의 영화가 풍부하게 읽히고, 보이는 것을 보면 단순히 물리적인 작품에 한정된다기보다 개별로서의 '현상'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왜 나는 '오즈적인 것'에 대해 입을 모으면서도 그것을 한정하려 했는가. 애정을 표하면서도 어찌 그것들이 모두 엇비슷한 것들의 반복이라고만 느꼈던 것인지. 오즈에 대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애정 어린 시선들을 보며 나는 과연 그에 얼마나 충실하게 감정을 표현했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태그 갤러거는 마지막으로 "아니, 존 포드 영화는 100편이 넘는데 지금 서울아트시네마 이 곳에서는 단 16편만을 튼다고 한다. 이거 다들 피켓을 들고 데모해서라도 모두 10번 이상 틀게 하라!고 해야하는거 아닌가! (프로그래머 김쌤을 가리키며) He wants your help! GO FOR IT!"라는 말을 남겼다. 우선 이 참에 줄곧 지나쳐왔던 존 포드를 만나볼 참이고 앞으로야 뭐 모스필름, 올리베이라(ㅠ_ㅠ), 베니스, 친구들영화제가 남아있으니 당분간 데모할 일은 없을테지. 사실 항상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우리 극장인지라 혹여라도 그런 데모질 같은 호사를 부리는 때가 오기나 했으면 좋겠네. 이 참에 박원순 서울시장님은 어서 아트시네마에 대한 지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해주시라!

지인의 추천으로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How Green Was My Valley>는 반드시 봐야만 한다고 한다. 마지막 상영이 9월 25일 목요일 17:30에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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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고 믿었던 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간다. 오늘은 알랭 레네가 떠났다. 믿고 싶지 않았는지 예하가 전화를 걸어와 사실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대로 영화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한다는게 너무 고문이고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들이 이렇게 떠나가는 것이 불안한 것은 현대 영화들에 대한 불확실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네마테크의 존립 자체가 염려되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다 정말 영화라는 것, 영화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무섭다.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고 마주하는 시간들은 점점 단축되어간다. 필름은 사라지고 각자의 집에서 혹은 지하철 안 핸드폰으로 시간과 공간은 점점 확장해 나가는 듯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소비되고 증발해버리며,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인내는 얕아지고 있다. 최근작인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젊음의 활기로 가득했던 것을 상기시키면 91세 이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저 연극의 일부인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올리베이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는 이미 뱀파이어의 나이로 들어섰으니 죽어도 안 죽은 셈 치자라고 하였지만 그 외 백발의 노인들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아찔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장 뤽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미하엘 하네케, 장 피에르 레오, 장 루이 트란티낭, 엠마누엘 리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한 시대가 통째로 기억 속에만 남게 되겠지.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로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행복한 기운으로 추모하려들겠지만 그것도 잠시 현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때는 어떡해야 하나. 시네마테크로 발을 돌리겠지만 이 보금자리의 미래는 누가 보장해주나. 마음이 어지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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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들을 기록을 통해 그 면면을 포착하거나 붙잡아 두고자 한다. 아내를 홀로 둔 채 망망대해로 떠나와 있는 폴은 하루 8 시간 가량을 흔들리는 뱃속에서 기계와 씨름해야하는 화물선의 선원이다. 별안간 배를 이탈해 리스본의 한 항구에 내린 그는 쉴 새 없이 8 미리 카메라로 자신과 주위 풍경의 모습을 담아간다. 이것은 아내에게 영상 편지로 전달되어 스크린으로 다시 영사된다. 좀 전에 본 낯익은 모습들이 8 미리로 촬영된 것을 다시 볼 때 우리는 그와 함께 동행하며 도시를 거닐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백색도시>는 바로 이 남자와의 언제 끝날지 모를 동행이다. 일상 속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찾아올 지 모르는 감정들의 여백에 대해 생각하며 그를 응시하게 되는 것. 기약 없는 이  여행객은 누군가들의 일상 속에 몸을 내던진다. 춤을 추기도 하고 주먹질에 얻어 맞기도 하며 하물며 소매치기까지 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여자를 만난다.

 폴은 백색이 곧 고독이라고 말한다. 백색은 모든 것에 흡수되버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빛으로써 그것들을 잠식시킬 수 있는 힘도 지니고 있다. 여자는 사랑에 빠져들다가도 지금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어딘지 끊임 없이 재차 돌아본다. 늘 느긋하게 웃어 보이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불안은 돌고 돌아 결국 그가 방문자란 사실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실제로 화물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감독이 담아낸 리스본의 풍광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쓸쓸해보인다. 영화의 첫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푸른 물결이 안개에 가려져 있는 가운데 아득히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뒤에 한 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여자의 몸은 광활하며 바다와 같다는 말을 남긴채 그는 어디론가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바다만이 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색도시>는 이 기억들을 어루만지며 놓치지 않기 위한 모든 '방문자'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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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지하철, 1980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극장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고 영화가 시작되는데 왠지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 지하실에 갇혀 지내야 했던 남 주인공에 대한 어슴푸레한 기억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에서도 비가 내렸다. 마치 상영관 위층으로 올라가면 까뜨린 드뇌브가 좀 전의 연기가 어땠느냐며 물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상영이 끝난뒤 일전 이수에 있던 극장에서 <누들>이란 영화를 봤을 때의 기억이 올라왔다. 꼬마 남자아이가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 트렁크 가방 안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더란다.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뒤 텅 빈 상영관에 앉아 있는데 문득 내가 트렁크 가방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무한히 샘솟는 희망을 안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 <마지막 지하철>은 보고 나자 극장 안이 엄청난 고독감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언젠가 집에서 조그만 모니터로 보았던 영화와 동일한 것이라기엔 감흥의 여파가 너무도 다름에 또 한 번 놀랐다. <이웃집 여인>의 경우 연소해버린 잿더미 속 같았다면 이는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불길함으로 인해 스크린 너머에 미처 꺼뜨리지 못한 혹은 꺼뜨릴 수 없는 불씨를 두고 극장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연극 연출가 뤼카 스타이너(헤인즈 베넨 분)는 남 배우 베르나르(제라르 드빠르디유 분)에게 아내 마리옹(까뜨린 드뇌브 분)이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이 있음을 첫 만남에서 넌지시 대화를 통해 전한다. 내내 흔들림 없이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마리옹이 남편 뤼카가 거처하고 있던 지하실을 독일군이 수색하려 하자 베르나르에게 도움을 청한 때다. 붉은 화장과 옷에 흐트러짐 없는 머리와 눈빛으로 무장한 그녀는 남편의 빈 자리를 대신해 굳건히 극장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남편에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마음 속으로 불안과 처절히 싸우고 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인다. 앙트완 드와넬 연작에서 보여진 트뤼포 감독에 대한 인상은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상황들을 유희하듯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지하철>을 포함해 <이웃집 여인>, <부드러운 살결>과 같은 작품에서 그는 놀랍도록 감정의 결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끓는점 직전까지 치고 올라가는 그 여정을 보노라면 정말 경이로운 감정의 환희를 앓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메리카의 밤>에서 촬영장 곳곳에 상주하고 있는 뜨개질 할머니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계산 하에 두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배우들의 호흡에 맡긴 부분이 더욱 큰 것인지에 대한 여러 궁금증들 때문이다. 만일 과거로 돌아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나 혹은 그 도처에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면 트뤼포 다음으로 최근 들어 역시 이러한 의문들로 나를 자극 시킨 자크 로지에 감독에게 <오루에 쪽으로>의 연출 비화를 묻고 싶다.


 다시 <마지막 지하철>로 돌아와 마리옹이 감춰왔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을 꼽아보면 베르나르가 레지스탕스를 위해 떠난다며 짐을 챙기던 때다. 아마 그 전에도 둘 사이의 미세한 제스쳐들이 몇 차례 있었던 걸로 짐작한다. 예로 그가 여자들의 손금을 봐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옹의 곁눈질 시선 등이 그러할테다. 지하로 새나가는 남편의 귀동냥 없이 온전히 둘만 방에 있게 되면서 처음으로 밀회를 즐긴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재회하게 된 둘. 배경은 병원으로 베르나르는 부상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극장을 떠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는 여인을 옆에 두고 텅빈 눈빛을 띄고 있다. 이전의 모습은 간데 없이 비로소 둘만의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애정을 구하는 마리옹. 그녀가 남편으로 추정되는 이의 부재를 전하는 순간 나와 관객 모두는 이제 새로운 연인들의 앞날이 시작되는가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뤼카가 연출한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생각해 볼 여력도 없이 지상으로 올라 온 뤼카가 무대 위로 올라 관객들에게 소개되고 박수를 받는다. 여기서 마리옹은 잠시 주춤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양 손을 잡고 인사를 올린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감정이 있음을 인지했던 상황, 그러니까 지하에서 지내던 중에 쓰여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이 좀 전의 우리가 착각할 뻔 했던 모습인 것이다. 800여 일간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할 지라도 수 만번이고 엄청난 고독과 싸우며 무너지는 과정을 온 몸에 아로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박수 치며 환영하는 뤼카의 모습은 너무도 말쑥하며 그 누구도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가늠해보기 힘들다. 아내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당사자 앞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말한다는 것은 본디 뤼카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도 있을 지 몰라도 이미 수 차례 그의 상념들 속에서 손으로 지면으로 그리고 무대 위로 향할 준비를 하며 떠나가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이 감정의 누수를 목도한 순간 <마지막 지하철> 또한 파국을 향하는 <이웃집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그들은 과연 마지막 지하철을 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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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습을 거부하자 더 깊은 물에 빠뜨리겠다고 불호령을 내리는 수영 코치의 말에 꼬마 미켈레는 다른 종목을 찾아가겠다며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매우 강력히 주장한다. 아이는 수년 후 자신의 운명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어머니의 말대로 수구 선수로 성장하며 유년 시절의 결기를 고스란히 지닌 채로 공산당의 대표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 사고를 당한 미켈레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채로 자초지종을 챙길 새도 없이 수구 시합이 열릴 수영장에 놓이고 만다. 경기가 열리는 내내 끊임 없이 케익 따위를 들고 따라다니는 의문의 두 남자, 가정사를 운운하는 스포츠 여 기자, 현자로부터 답을 구하려는 양 매달리는 남자 등 여러 사람이 그에게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 시절의 드문드문한 기억 몇 개가 용케 그를 찾아온다.

 "어제는 아팠지만 오늘은 괜찮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끌려온 듯한 어떤 아이가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는 동안 한 어머니가 소리치는 장면은 그것들 중 하나로 영화의 전반적인 맥락과 매우 맞닿아 있다. 얼떨떨한 상황에 처해있는 그를 다짜고짜 선수들이 타고 있는 버스에 납치하듯 태우는 장면부터가 그러하다. 이러한 정황들로 인해 시합과 온전치 못한 일상을 오가며 그는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의 중심에 선다. 유유히 헤엄을 치다가도 물이 너무 깊다며 소리를 질러 장 내 청중들 모두가 그를 다독이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상황까지 연출될 정도.

 이렇게 줄곧 청년과 소년의 기억를 오가며 행동을 달리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큰 수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수상해 보이는게 난니 모레티식 코미디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로 시합을 판가름 낼 마지막 골을 던지려는 찰나 난데없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보기 위해 경기장 내 바 앞의 조그만 텔레비전으로 관중 모두가 몰려든다.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지켜보는 것처럼 선수들까지 수면 위로 하나 둘 올라오는데 그 모습이 꽤나 기이한 것이다.

 영화 전반의 배경이 되는 수영장의 모습 또한 미켈레와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하다. 그가 사고 이후 가장 먼저 맞닥뜨린 그 곳의 모습은 마치 요람 혹은 놀이동산처럼 보여진다. 아이스크림과 컵케익 그림 광고판들이 뗏목처럼 흐르더니 잔뜩 긴장이 서린 표정으로 양팔을 올리고 둥둥 떠다니는 게 흡사 개구리를 연상케 하는 선수들이 지나간다. 경기에 탄력을 받은 선수들이 힘차게 물을 거슬러 가는 모습에선-특히 고속 촬영으로 연출된- 수영장 특유의 냄새가 몸에 배긴 듯한 착각에 들 정도로 청량함이 가득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쾌재를 부르다가 자신을 추종하는 열혈 지지자(!)를 귀찮다고 밀어내더니 경기 끝나고 먹는 피자 맛에 자신이 여태 이 자리에 와 있는 거 같다고 하는 남자. 과거 파시스트라며 비난했던 친구에 대한 자신의 처사를 반복 상기하며 이를 전면 부정했다가 이내 자괴감에 빠지고 마는, 선거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 진 당의 대표. 영화의 후반부에 이를 수록 공황 상태에 놓여 있던 그가 조금씩 기억과 해답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언뜻 보인다. 그러나 어디로 향할 지 모르는 공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던 중 맞닥뜨린 엔딩은 다소 가볍게 넘기기엔 어딘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며 기묘하다.

 <빨간 비둘기>는 감독의 청소년 시절 이탈리아 수구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는 이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본의 아닌 자아 찾기 여정 안에서 최근작인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에 이르기까지 연기와 연출, 각본, 배급을 도맡으며 자신만의 화법대로 영화 안에서 정치를 풍자해온 모레티다. 종종 이탈리아의 우디 알렌이라 불리우는 그의 속사포도 매력적이지만 차창 너머 꼬마 아이들에게 혀를 내밀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은 엉뚱하면서도 귀엽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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