쎋 빠히

카테고리 없음 2014. 6. 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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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도착한 날 첫 메모

2호선쿠션 무늬가 제일 맘에 듬.
맥 플러리가 3.1유로
심지어 화장실이 1유로인 곳도 있음
섹시 벨이라니 허접하다 허접해

숙소 주인인 안나가 북역으로 마중을 나와주었다. 그녀는 일 때문에 친구 집에서 지낼 것이라 하고 룸메이트인 얀이란 친구와 나 단둘이 지내게 될 것이라 했다. 영국에서 28인실 혼성을 쓰긴 했었어도 난생 처음 남성이랑 둘이 생활 공간을 공유하라니. 그것도 샤워실은 문도 안 잠긴대. 긴장과 흥미로움이 오가는 가운데 첫 날 침대방에서 멀리 등대처럼 비추는 에펠탑 불빛을 보았다. 여기가 파리냐.

섹시 벨은 첫 날에 쓴 메모는 아닌 거 같은데 몽마르트 언덕에 우연히 흘러 들어갔다가 팔찌 파는 아프리칸 남자에게 들은 말이다. 계속 나한테 다가오지마하는 오만인상을 쓴 채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녔다. 인상을 쓴 건 혹시나 하는 마음 그러니까 단지 겁을 조금 먹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긴장을 내려놓을 수 없는 여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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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를 어떻게 채워 나가야 하나 런던 초반에 했던 생각. 그러나 이내 곧 내가 꽤나 부지런하면서도 게으른 것도 아니고 뭐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나를 조금 알게 된 느낌이다. 그냥 걸어 돌아다니며 시내 전역을 익숙하게 몸으로 눈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뿐 그 이상 투어 관광이 조금이라도 몰려 있는 곳이라 생각되면 무조건 피해다녔다. 이 곳에 줄곧 거주해왔던 사람처럼 카메라나 지도 따위 등을 손에 쥐지 않고 주머니에 쉽고 편리하게 넣어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지 않고 앞만 보고 걸으면 이내 관광객이 길을 물어오곤 했다. 그러다 정 안되겠다 싶은 순간에는 지도를 펼쳐들고 불안의 눈동자를 굴리며 런던 시민에게 익스큐즈 미하며 호소를 했으니 나도 참 간사하고 편리한 인간이구나 싶어 웃었다.;;

온전히 나를 중심으로 시간이 돌아간다는게 좋다. 아침에는 점심 도시락을 싸기 위해 통마늘을 까야했는데 그 노동에 그토록 많은 힘과 근육이 쓰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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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영과 한 시간 조금 안되게 통화를 하고 나서 든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사람들로 온통 견고하게 둘러싸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성벽이기보다는 등대였으면 하는 느낌.

그냥 걷다가 흘러 들어가면 이내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성이나 공원이 드러났고 조금만 더 걸으면 우연히도 루브르가 나타났다.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 꼭두머리를 보고는 무작정 그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꽤 가깝다고 여겨졌지만 길을 헤매고 결국 버스를 타느라 두 어 시간 정도는 지체되지 않았었나 싶음. 에펠탑은 무척 크고도 선명했으며 탑 바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여성의 음부를 올려다보는 기분이어서 황급히 샤요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바라본 에펠탑은 400번의 구타에서 본 그 탑이었고 가까이에서 본 것은 몽상가들에 나오는 거대한 생명체였다. 이제야 지미 헨드릭스 노래에 맞추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던 에펠탑의 모습이 이해된다. 마치 인간의 몸을 훑듯.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느낌을 발견하지 못했겠지. 그제야 보길 잘했다하는 생각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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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전철에서는 시선이 교차된다. 문 옆 의자에 앉은 나는 출입문 창에 비추는 앞에 앉은 사람들을 보는데 이 시선은 왼편을 향해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앞에 마주 앉은 남자는 내 쪽을 보고 있다. 그러다 내가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둘은 눈이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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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철이 천정에 있는 등만 빼고 모두 불이 꺼졌다. 그것도 지하 철로 한복판에서. 모두가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뭐라 하는 지는 모르겠고 옆에 있는 노인네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툭툭 연신 쳐댄다. 그게 요술을 부린 모양인지 1분도 안되어 전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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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 노선으로 갈아타려는데 전철의 외부 창이 새까만 먼지로 뒤덮여있었다. 자꾸 설국열차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건 잿더미 열차라고 해야 할까;; 샤를드골 에틀레?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는데 순간 전철 내부가 사람들 말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두가 퇴근하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서울에서 만원 지하철이 정적으로 가득한 가운데 다들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참 다르다. 그리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던 여자 아이가 사람들이 들어차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석을 한다. 그냥 우기며 앉아 있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알고 보니 누구나가 다 그러더라.

오후 8시대의 리옹역 방향 RER 노선은 다시 타고 싶지 않을 거 같다.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 내부는 덥고 답답하며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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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의 국외자들을 몇 년만에 보는데 그 당시에도 전철이 있었다니! Libertè역. 그리고 심지어 Monoprix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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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켈리가 캐씨를 쳐다보던 그 눈빛. 연기였을지라도 진심이 느껴진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다. 모두가 박수 쳤던 <Singing in the Rain>

그리고 집으로 오던 밤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가에 목줄 없이 남자와 함께 눈과 발걸음을 맞추며 걷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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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에 장 비고의 <라탈랑트>를 보러 갔다. 매표소 직원 앞에 섰는데 그녀가 "Bonjour!"라고 내뱉은 한마디에 당황해서 하려던 말을 까먹었다. 왜냐하면 저녁 8시였고 나는 당연히 "Bonsoir"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관 입장을 위해 줄서있는데 전주영화제에서 샀던 포르투갈 감독이 그려진 에코백을 가져올걸 그랬다.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왜! 파졸리니 에코백을 매고 있는 사람에게 그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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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지만 영화가 끝난뒤 그 감흥이 어떻든 간에 너는 쓸쓸함을 안고 극장을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영화는 결국에 네가 살아가는 현실이 씁쓸할 수 밖에 없음을 안겨준다. 하나 둘씩 극장을 들어오는 이 사람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갑자기 눈물이 차기 시작했다.

첫 관객은 5-60대의 아저씨, 두번째는 왠 동양인 여자, 세번째로는 예쁜 머리칼과 수염을 지닌 남자, 네번째로는 중년의 여자와 임산부가 함께 들어왔고 그 다음으로도 중년의 여자 한 명. 조금 전에는 대머리의 중년 남자가.

MK2 Beaubourg? 이 극장의 선곡이 참 좋다. Feist 음악이 갑자기 생각나면서 그녀의 노래만 종일 틀어두어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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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 멈추면서 바람이 불었고 왼쪽 뺨에 있던 잔머리가 오른쪽으로 쏟아졌다. 많이 기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전철이 어느 곳으로 추락하고 있었으면 했고 눈을 감고 있었던 상태에서 앞이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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