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건 어떤 의미일까. 무수한 죽음과 탄생들이 매일, 매순간 교차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상실을 위로하고 어떤 식으로건 공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감히 그 고통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쉽사리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혼자 묵혀두는 때가 더 많다. 어제는 운명치곤 혹독한 하루였다. 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준비하며 가장 친한 친구 어머니의 작고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생일 축하하는 자리를 친구집에서 갖기로 해 이미 열댓명의 사람들을 초대한 후였다. 파티를 취소할까도 했지만 친구는 어차피 친척집에 가게 되어 자리를 비울 것이기에 그러지 말라 했다. 5일간의 출장 끝에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소식을 접한 다음날이자 내 생일잔치인 날 아침 친구 집에 갔다. 혼자 사는 친구 집에 다행이 친척 한 명이 와 있었다.

적막이 가득한, 슬픔에 잠긴 그 공간은 몇 시간 내로 누군가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자리로 채워질 참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너무 괴로웠지만 일상이란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파티를 하며 새로 이사 온 도시에서 관계를 맺게 된 한 명, 한 명에 스스로를 비추어보면서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죽는다면 그 감각은 소멸되는 것인지 ‘죽는다는 감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파티 다음날 친척과 친구집에서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온 친구를 기다렸다. 그는 어제부터 줄곧 나를 볼 때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며 미안하다 했다. 방금 엄마를 잃은데다 그와 혈육들 누구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나를 챙겨줄 수 있는지.. 놀랍도록 침착한 그의 상태에 당혹스러웠다. 친구를 포함해 누나가 두 명이 더 있지만 자녀 누구도 장례에 참석하지 못해 아버지 혼자 모든걸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생일은 다음이고 내일이고 언제든 축하하면 되지 지금 너가 나를 챙겨줄 그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마침 돌아온 세월호 9주기가 떠올랐다. 재난은 일상을 여러모로 송두리째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미래도 계속 될 것이라 여겼던 평범함들도 모두 앗아가버린다. 그 아이들과 어른들은 알았을까. 내년 그들의 생일엔 본인들이 자리할 수 없을 거란걸. 

1년 새에 두 국가와 도시를 경유해 겪은 우울과 고독 끝을 지나오며 스스로가 '생존'해내고야 말았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올해 이렇게 생일을 맞이 할 수 있음을 축하하고, 받고 싶었다. 내년 생일도 이렇게 무사히 맞이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이토록 일상과 재난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사회를 살아가게 된 걸까.

얼마 전 이슬아 작가의 수필집에서 그가 학생들과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바다에 가라앉은 모든 이들의 이름을 적는 작업을 했다는 걸 읽은 적 있다. 누군가에게 평생에 걸쳐 불려왔을 이름들. 이름으로 불리고 기억될 그들의 존재.

9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그들의 이름을 모두 읽어보았다. 모니터 화면으로 스크롤을 자꾸 내려도 삼백명이 넘는 이름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한 학교의 한 학년 학생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말도 안되는 사고였다. 그 외 설레는 마음으로 배에 몸을 실었을 여행객들과 일하러 다녀온 뒤 다시 만나게 될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을 세월호의 선원과 직원들. 칠흑같이 어두운 두려움과 죽음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 잠수사와 죄책감을 견뎌내지 못해 사고 이후 운명을 달리한 이들도 있다.

오늘 온종일 친구 곁을 지키며 어머니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셨는지 물어 함께 듣는 시간을 가졌다. 배고프다하면 밥을 먹고 울다가 낮잠도 자고 다시 차를 끓이는 일상이란 시간이 무엇인지 애도가 무엇인지 연습하고 수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이름은 타라. 타라가 부디 고통 없이 잠들었기를 그리고 나의 친구 알리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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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X 월드>

암중모색 2020. 10. 29. 17:20

출처 :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0240485&query=%EC%9B%B0%EC%BB%B4%20%ED%88%AC%20X-%EC%9B%94%EB%93%9C%20%ED%8F%AC%ED%86%A0

 

영화가 시작하며 '시월드'라는 얘기에 시어머니로부터 고통 받는 여성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여기서 '시어머니'와 '여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게 된 순간적인 의식의 흐름을 짚어보고 싶다. 엄마는 즉 나를 낳고 기르고 보호해주는 데에 헌신한 이로서 '여성'과 '개인'이라는 정체성보다 '엄마', '모성'이란 것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몇 년전부터 엄마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반면 시어머니는 어떠한가. 한국 드라마에서 그들은 홧병의 근원이자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데 한 역할하는 이들이다. 우리 엄마의 시어머니만 해도 내가 태어났을 때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당시 엄마가 받으셨을 상처에 비할 데 없지만 이는 이따금씩 잊을만하면 나를 울컥하게 한다. 내 탄생이 축하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런 대우를 받아야 했을 엄마 곁에 '지금의 내가' 있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서다. 보통 시월드에서 나쁜 역은 시어머니가 도맡아 하는 데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사랑'을 시전하거나 막상 중요한 때에는 꽁무니 빼버리는 얄미운 대상이기에 이 빗나감에 당황했다. 언제, 어디까지 여성들은 악역을 자처해야 하나. 주입 된 K-드라마 공화국의 서사에 물든거 같아 괜히 민망하고 화가 났다.

 

주인공 최미경은 오래 전 사고로 남편을 여의고 12년째 '시아버지'를 보필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렸을 때 매일 같이 "엄마, 그냥 아빠랑 이혼하면 안돼?"라며 마치 구멍가게에 가서 과자 사오는 일처럼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양 묻곤 했던 그 때의 마음 같았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그를 보필 할 시가 친척이 미경만이 아님을 안 순간에는 배신감마저 느꼈다.

 

'큰며느리의 업보'였다.

 

나의 큰엄마도 이모도 최근까지 그 굴레에 있었다. 남편을 잃고도 '도련님들'을 도와 제삿상을 차리고 설겆이 일을 했던 큰엄마는 최근에 먼 교외로 이사를 가셨고, 시댁 근처에 살며 도통 집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모의 시아버님은 불과 몇 달 전 돌아가셨다.

 

미경의 시월드는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독립 통보'로 흔들린다. 12년을 함께 살아 온 한 식구인데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을 지는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시아버지는 방 안 냉장고에 생라면을 넣어두고는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며 본인만의 세상을 구축하신 듯한 분이다. 면의 숙성도와 쫄깃함을 높이기 위한 고단수의 노하우이신걸까. 때때로 '창문'을 넘어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여러 세상을 넘나 드는 듯한 기이함까지 느껴진다. 요양원에 계신 우리 할아버지는 아흔 다섯의 나이에 치매를 앓고 계시다. 사랑하는 손녀인 나를 때때로 기억해내시기도 하지만 대게는 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 때 그 때 떠오르는 파편들을 헤집고 다니신다. '노인'이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과연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을 연출한 장혜영 감독의 노랫말이 습관처럼 생각나는 요즘이다.

 

딸 한태의는 방문 하나 없는, 열린 공간에서 그 둘과 함께 기거한다. 여지껏 평생 내 방 한 칸 가져보지 못한 이로서 그 고충을 알기에 할아버지가 '방 문'을 떼어버렸다는 대목에서 나는 거의 발작 직전 수준이었지만 막상 그는 크게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미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참 낙천적이다. 카메라 뒤에 숨어 그 고민들을 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갑작스런 '독립'에 대해 여러가지 경우를 떠올려보다가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라며 카메라를 돌려버리는 그의 행보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여리고 힘든 미경이 기댈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일까. 두 모녀의 관계를 보며 어느 때 보다도 '반려자'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눈물이 많은 엄마를 어느 순간부터 안아주게 된 나의 모습도...

 

영화에서 둘은 두 번의 결혼식에 동행한다. 카메라를 든 딸 태의는 엄마의 모습을 멀찌감치서 바라본다. 여전히 결혼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는 소녀처럼 맑고 진심을 다해 축하해주고자 하는 그녀의 눈망울을 클로즈업한다. 두 번째 결혼식에서 미경은 부부가 된 이들을 보며 "둘이 닮으면 오래 산다던데"라고 말한다. 영화 초반에 미경과 그의 남편의 범상치 않았던 신혼 시절 사진들이 순간적으로 오버랩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사람, 참 예쁘고 근사했는데 그러면서 말이다.

 

카메라는 대게 집 안 곳곳에 놓이거나 엄마를 밀착해 따라 다닌다. 워낙 연예인들의 일상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이 일상이기에 누군가의 집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카메라는 집의 전경을 담기 위해 높이 매달리지도 그렇다고 삼각대 위에 균형을 잡는 등의 계산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심코 밥상 위에 올려놓는 핸드폰처럼 그들의 일상의 일부처럼 놓일 뿐이다. 그러나 엄마의 뒷모습을 비추거나 프레임 안에 감독이자 등장인물인 딸 한태의가 '들어가' 대화를 시도함으로 서사가 전개될 때에는 감정적인 '사건'과 '시선'이 발생한다. 마치 이것이 부재한 아버지의 시선인 듯 말이다. 카메라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며 감독이 카메라를 들게 된 시작점이 궁금해진다.

 

둘은 낙관의 힘으로 결국 새로운 보금자리를 갖춘다. 그리고 함께 처음 '선택한 가족'으로 강아지 '호주'를 맞아들인다. 타지에 사는 오빠와 빔 프로젝터로 화상 통화를 나누며 새로운 방식의 유대를 찾아가기도 한다. 시월드로부터 성큼 걸어 나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미경에게 태의는 더 없이 근사한 동반자다. 나의 엄마 그리고 이모, 큰엄마.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영화가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다양한 여성 개인들의 서사가 더 많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 표현이 다소 완화된 부분의 버전으로 오마이뉴스에 기고

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68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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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

암중모색 2020. 3. 4. 01:04

"우리 개개인은 다 멀쩡한 사람이야. 문제가 없어. 근데 넷이 모이니까 비교가 되잖아. 너는 그냥 원래 그 시간에 일어나는데 늦게 일어나는 애가 돼버리잖아. 그리고 너는 원래 네 속도가 있는데 느린 애가 되고. 나는 성질 급한 애가 되고. 그게 우리의 문제였어. 비교."

"Each one of us is a fine person. No problem. But it becomes comparable just because the four people are gathered. You just wake up at time you usually do, but it makes you as a person who wake up 'late'. Your own rhythm becomes 'Slow person', and i become impatient person. That was our problem. Comparison."

 

요즘 들어 개개인의 표현 방식과 온도 차에 대해 자꾸 고민하게 된다. 분명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텐데 너무나 다른 경험치와 배경을 가지고 자라 온 각자에게는 어떤 때에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3개월 간 심리상담을 통해 스스로를 한 개인으로서 돌아볼 수 있는, 너무나 근사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는 타인이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습 간의 간극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견제하게 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치'다. 어디까지나 나를 기준 삼아 상황과 맥락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 '기대치'를 줄이고자 함은 관계를 놓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타인을 내 기준과 상황에 맞추게 될까봐서다. 그냥 그러려니 넘겨짚을 줄 아는 것도 필요하고 예민하게 감각을 곧추 세울 때도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단지 '너 너무 예민한 것 아니야'라는 말로 상대의 겹겹이 쌓여온 시간을 뭉개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렇게 서로 맞추어 나가고 실패하면서도 자꾸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 요즘은 그렇게 파도를 타고 있다.

 

These days, I think of how people express themselves and what the temperature difference is. It certainly wasn't an intention, But sometimes it hurts each one who has grown up with so many different experiences and backgrounds. For last three months, getting the psychological counseling, I had wonderful time looking back on myself as an individual. Now, the way people and I find myself seems to stop a gap step by step. At the same time, I try to keep my ‘expectation’ of others in check. We can only realize the circumstances and context based on ‘myself’. The reason why I try to lower that ‘expectation’ is not giving up the relationship. I got to know I sometimes put the others to my standard and circumstances. (Well. I know we can’t help it, but..) We need to let it go and also keep our sensitivity at the same time. But we should not flatten someone’s layered times by just saying “You’re too Sensitive”. We try to coexist and fail all the time. But the mind want to keep it. That’s how I surf on the waves now.

 

2019.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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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등장인물, 스토리, 감독 등에 대한 정보 전혀 없이 동네 친구들과 운 좋게 우연히 보게 된 심야영화였다. 정말 많이 웃었고 즐거웠다. 그리고 잘 쓰여진 대사들과 배우들의 캐릭터에 감탄했다. 그렇지만 그 웃음들 이후 불편하게 머릿 속을 헤매는 잔여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역시나 벗어나지 않는,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편견. 이 영화에서 대사를 가진 여성은 4명이다. (연출자의 지난 작품에 비해 주연급 5명 중 무려 1명을 여성으로 넣었으니 이를 발전이라 해야 할 지 모르겠으나...)‬


1. ‪잠복 수사 중에 중년의 여성이 마약반 형사를 두고 왜 자신을 스토킹하냐며 따진다. 여기서는 사회적인 ‘여성성’(성적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중년’으로 설정했다는 데에서 교묘하게 비켜나가며 이를 유희로 승화시키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건 ‘스토킹’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몇 년전 머리 나쁜 이 모배우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멍이 든 내 다리를 보고 십 여명의 스텝들이 있는 자리에서 “어? 데이트폭력?”이라며 깔깔 웃었던 적이 있다. 만일 그것이 정말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얻어진 상처였다면?


‘일방적인 폭력’은 유머의 소재가 아니어야 한다.‬


2. ‪공동 주연급인 마약반 5명에 그나마 여성 캐릭터 이하늬 한 명을 끼워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지.. 그러나 그녀의 로맨스 라인은 흡사 미녀와 야수 급이다. 외모로 비하 받기 일쑤인 상대 동료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키스를 나누는 순간 동료들은 대번에 그들을 두고 농담으로 (총을) 쏘라고 한다. 상대가 평소 외모 비하로 놀림 받아오던 대상이 아니었어도 그런 농담이 유머로 기능할 수 있었을 지 의문이다.


3. ‪마약반 반장의 부인은 철야로 잠복 수사를 하고 들어오는 신랑의 빨랫거리를 항상 명품 종이백에 담겨진 채로 받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복수사로 인해 우연히 큰 돈을 벌게 되자 그 명품 종이백에는 진짜 실물의 명품백과 현금다발이 담겨온다. 부인은 이에 기뻐하며 “나 씻을까?”라며 화답한다. 연출자는 집안일(무료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에게 ‘명품백’이 과연 그 노동들에 응답하는 선물이라 순수하게 생각하고 쓴 것인지 궁금하다. 명품 좋아하는 여자는 곧 사치스러운, 일명 된장녀라는 익숙한 서사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에 성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응답하는 아내(안 사람-을 뜻하는 말이어서 쓰기를 지양한다). 여기서 그녀의 역할은 '안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게 전부다.‬


4. ‪마약왕을 보필하는 보디가드 여성은 우리가 킹스맨에서 열광했던, 매력적인 살인무기를 연기한다. 그녀는 무자비하게 마약왕의 오더에 따라 사람들을 처치할 뿐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다. 마지막 그에게 버림 받았을 때 내뱉는 한 마디가 이 캐릭터가 가진 대사의 전부다. 살인무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남성들은 이에 대한 어떤 지배 받는, 압도 되는 이상한 판타지가 있는 듯 하다. (하도 어이 없어 장문의 글을 쓰다 멈춘 <마녀>에 대한 이야기에서 추후 이것을 더 이어갈 수 있을 거 같다.)‬


‪한국 영화에서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었던 마음은 역시 웃음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다행이 이것이 올해 첫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에 덜 허망해해야 할지...


그리고 채식을 하는 이로서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저런 포스터 속 카피(닭을 잡을 것인가 범인을 잡을 것인가)는 감히 생각도 못해냈을 것이다. 애초 닭이 곧 '서민'이라고 명명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가치관 아니 대한민국 사회의 치맥으로 단결 된, 지나친 소비는 이를 당연한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생닭을 토막내고 조리하는 장면들은 정말 보기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치킨 소비'가 팽배한 모습들 사이에서 나는 종종 침묵으로 빠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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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북에 올렸던 가편집 기사 구인 공고 게시물을 삭제했다. 제작 이사에게 전달 받은 단가로 100만원 선인 작업이었고 처음 내게 제안이 들어왔으나 기한이 맞지 않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사실 드라마 편집 경력이 없는 나로선 프로덕션 측에서 제시하는 가편집이 얼마만큼의 노동력을 얘기하는지 디테일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치만서도 매우 적은 금액이라 생각했다. 주위에 편집 일을 하는 사람 인프라가 적기도 해서 이게 가능한 금액인지라는 질문을 포함해 지인 몇에게 물어본뒤 페이스북에 글을 게시했다. 말도 안되는 금액이라며 최소한 얼마는 받아야한다는 얘기라도 듣고 제작사에 전달해야겠단 생각도 있었지만 그만큼 마음을 쏟아 부을 여력도 시간도 없어 그러고 말았다.

오늘 새벽 마지막 촬영 때 감독과 제작팀원이 나누는 얘길 들었다. 아직 가편집 기사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고 제작팀원이 지인을 소개해주려는 참인거 같았는데 그 지인은 평소 3분짜리 영상 제작에 2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포맷이나 후반 작업의 디테일은 모르지만 60분짜리 웹드라마 가편집 100만원이 단단히 잘못된 금액이라는 것만은 다시 한 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프리랜서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건 비영리 시민단체들이었다. 먹고 사는 일이 촬영과 편집 일이라고 말하게 될 정도로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나는 근래까지만 해도 영상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일이었고 그냥 할 줄 아는 기술 이상으로 생각지 않으며 늘 스스로를 전문가 범주에 끼우기를 주저하고 실제로도 연마하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일은 지인들을 통해 계속 들어왔고 그 중에는 내가 없는 돈을 주고서라도 (격한 마음을 표현키 위해 과장한 표현치고는 현실적으로 너무 슬프고 위험해서 농담으로 자조하기 어려우나 아무튼-) 하고 싶을 정도로 근사한 기회들이 많았다. 그리고 늘 챙겨주는 마음들이 더 예쁘고 고마웠으므로. 그치만 페북에 올렸던 공고 글 이후 제작사에게 항의하지 않은 행동이 업계에 먹칠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속한 업계가 어떤건지 사실 보이지도 않고 결속을 다질만한 다른 사람도 많지 않지만 부끄러웠다. 실제 가편집 작업을 해보고 싶지만 경력이 많지 않아 고민된다는 마음을 밝힌 친구를 소개할 뻔한건 더 창피하고 스스로에게 화난다.

그래서 내년 나의 목표는 새로울 거 없이 늘 고민하던 거지만 자기검열을 멈추고 남한테 베풀고자하는만큼 나 스스로도 존중 받도록 애쓰는 거다. (나 존중 + 타인 존중 = 상생) 좀 더 구체적이고 단단한 방식으로 말이다.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한 고민의 무게로 대학 졸업 이래 개인 작업을 할 수 없었고, 만들고 난 지금도 마음이 물론 어렵다. 얼마 전엔 단순 변심으로 인한 수정 요구를 번복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나는 당신이 제시한 금액 내에서 그러니까 ‘딱 50만원 어치’만 작업한거고 그 외 말씀하시는 이펙트 같은건 내 영역이 아니라 잘라 말하기도 했다. 이만하면 재능기부에 착취되던 삶을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던 때보다 많이 성장했다. 나잇값이라는게 딴게 아니라 착취나 실수에 대한 경험이 있으면 그걸 번복하지 않는다는 건데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보다 나은 노동 사회! 노동 해방!!

+ 덧붙이자면 3분에 200만원이란 대목은 경종에 불과했던 것이지 작업의 특성 상 분, 초 단위로 단가를 책정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치만 적어도 ‘실 노동시간 + 노동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소요된 시간 (식사 + 이동 + 작업공간 유지 등) + 기술과 경력 + 작업으로 인해 클라이언트 측이 얻게 될 혹은 얻고자하는 효과, 파급력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기본적으로 고려하고도 남길 수 있는 이윤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실 지금 이것들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무래도 하고 싶은 작업인지와 예산의 충분함을 떠나 클라이언트가 내가 작업하는데에 얼마나 ‘케어’가 가능한지다. 앞으로의 목표는 이것들을 지치지 않는 내에서 차근차근 가져나가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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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여성과 동물의 이미지에 대하여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⑤ 혐오의 연결고리, 여성과 동물
2017.06.27 17:59:56

얼마 전 일본 앞바다에서 불법 포획되어 10여년간 돌고래쇼에 동원된 '태지'의 향후 거처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함께 지내던 돌고래들이 자연으로 방사되면서 종이 다른 태지만이 동물원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지는 우울증 증세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자살 시도를 반복했다. 동물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들이 불법으로 잡혀 온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누구도 그들의 고통을 구경하고자 부러 쇼를 관람하고자 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돌고래를 좋아해서 직접 보기 위해 쇼에 갔을 뿐인데 이걸 '혐오'라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했던 경험을 두고 혐오란 무엇인지 사회에서 여성과 동물을 두고 소비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둘의 연결고리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국내에서의 '동물 보호 운동'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장 대중적인 캠페인은 아무래도 유기동물 입양 캠페인이다.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사지말고 입양하세요'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반려동물 사랑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호감을 사기 마련. 그러나 오랫동안 국내에서 '동물 보호'를 한다고 하면 '개나 고양이를 유난스레 좋아하는 사람들' 즉 동물 애호가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해양 동물 보호 단체나 해외 단체들의 국내 지부 또한 생겨나면서 동물 보호 운동의 범주가 전보다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큰 성과다.('시 셰퍼드(Sea Sheperd)'라는 해양환경동물보호단체는 얼마 전 내년 출범을 목표로 한국 지부 설명회를 가졌으며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Humane Society International)은 몇 년 전 부터 한국에 지부를 두고 식용으로 길러지는 개들을 농장에서 구출해 해외로 입양 보내는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소젖 섭취가 인간이 비인간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착취, 억압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라는 모임도 생겨나 먹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채식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풍부하게 다루어 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다.  


반려동물, 실험 동물, 야생 동물 이외의 범주에는 우리가 동물원이나 관광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쇼 동물 그리고 빠르고 많은 먹거리 공급을 위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으로 길러지는 농장 동물 등이 있다. 범주의 기준을 살펴보면 대개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들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동물을 두고 강요하거나 소비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귀엽거나 혹은 맛있거나이다.

동시에 여성에게는 어떤 이미지들이 요구되는가. 미디어 속 엔터테이너 여성들은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동시에 애교를 겸비해야만 한다. 외모를 두고 강아지나 고양이에 비유하며 귀여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주체로서 존중 받기보다 대중, 대부분 남성의 입장에서 강요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결혼 적령기를 벗어나면 '임신'을 하기에 너무 늦은 '노처녀'라는 낙인이 붙기 마련. 동물들 또한 인간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한 평생 '출산'만을 하기도 한다. '작고 털이 빠지지 않는 종류의 개를 원해요'라고 하면 펫샵으로 오기까지 농장에서 그리고 이후 길거리에서 수 백마리의 생명이 낙오된다. (돈 주고 산 강아지,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보셨나요?인간 여성은 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남자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신과 출산을 요구 받는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남아선호사상을 두고 여태 이야기하느냐고 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그런 시대이다. 국가에서는 출산율을 높이겠답시고 가임기 여성 지도까지 만들지 않았었나. 결혼을 하기에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기에 적정한 연령은 없다.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한정된 프레임에서 동물과 여성에 대한 혐오는 다양하게 드러난다. '여성스럽다', '여자 같다', '동물적이다', '짐승 같다' 이 나열된 단어들의 뉘앙스를 짚어보면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 없다. 여성스러움 안에는 상대의 비유를 거스르지 않는 내에서의 순종적인 이미지가 숨어있기 마련이며 누구도 수치스러움을 내세우기 위해 '남성성'을 가져와 이야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남성답지 못함은 곧 여성스러운 것으로 치환된다. 

또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저지른 잘못을 '짐승'들에게 돌려버린다. 언행에 두고 반격 할 요량이 없기 때문에 손쉬운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영화나 소설에서 인물이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 하면 대부분은 이런 대사를 친다. '너는 나를 짐승만도 못하게 대했어', '그는 나를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팼어'와 같은 레퍼토리들 말이다. 일상에서는 만연하게 '개 같다'라는 표현도 쓰지 않나. 개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리고 짐승만도 못하게 대했다면 짐승은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것인지?

동물보호단체 PETA에서는 'I'd rather be naked than wear fur'라는 캠페인으로 많은 여성단체들로부터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고 말겠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셀레브리티들이 누드로 나서기 시작한 것. 그러나 이 메시지 이전에 우리에게 1차로 노출되는 것은 벗은 여성의 몸이다.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있어 이 이미지가 매체에서 '상품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모피 시장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엔 '누가 벗었다'를 두고 먼저 이야기한다. 여성과 동물은 이렇게 전시되고 소비된다. 

더욱이 많은 뉴스에서 보았듯 동물에 대한 혐오는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잔혹한 사례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멀지 않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들은 어떤 대상이기 이전에 모두 각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동물권이 아닌 '생명권'. 우리는 이렇게 감수성의 범위를 더 넓혀가야만 한다. 혐오는 어떤 것을 맹렬히 밀쳐내는 것만에 해당되지 않는다. 알고 싶지 않다는 데에서 혹은 단순히 싫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폭력이야말로 곧 '혐오'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 여성과 동물은 이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필요가 있다. 단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만이 다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삶'이란게 있기 때문이다. 


(필자 최미연 씨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활동가로 일했었습니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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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은 무엇들이 있을까. 국가? 사회? 가족?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가치를 인정 받고자 증명해야만 한다. 대학만 가면 어떤 삶이든 보장될 것처럼 말하던 이들도 있었다. 물론 살아보니 그것들은 높은 산을 오르며 ‘거의 다 왔어'라고 나를 어르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산을 오르고 나면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갈 일이라도 있지. <컴, 투게더>의 가족 앞에 기다리는 것은 흙탕물에 낭떠러지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단지 평범하게 사는 것, 그 뿐이었는데 가장 어려운 일이 되버렸다. 이것은 재앙이다.

혹독하고 처절한 시간들을 통과하는 이 가족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자, 함께'라고 말하는 감독의 시선은 굳건하고 묵직하다. 그들의 감정을 시선으로 압도하거나 휘두르지 않고 줄곧 응시한다.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딸 한나와 돌연 실직자가 된 범구 그리고 신용불량자 처지에 카드 회사에 다니는 미영. 영화는 각자의 일상과 공간들을 보여준 뒤 이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음식을 나눠 먹는 일 그러니까 ‘먹고 사는' 일이야말로 가장 쉽지 않은 세상이다.
딸 한나는 재수를 하며 또 한 번 대기번호를 받게 된다. 대학은 입시생들을 개인이기 이전에 수치화 된 대상으로서 희망고문을 할 뿐이다. 아직 대학 이후의 삶을 꿈꿔본 적 없는 한나에게 친구 유경은 기왕이면 너처럼 살라며 다른 삶도 가능함을 알려준다. 줄 세우기 경쟁에 내몰린 딸에 이어 아빠는 졸지에 사회(회사)에서 이탈하게 된다. 성접대를 받고 싶었던 상사의 눈치를 못 알아챘다는 게 퇴직 사유라면 사유다. 그가 밀려나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젊은 신입 인턴 사원. 필요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직장인으로서의 ‘질서’를 잃어버린 범구는 별안간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면서 집에 늘상 존재해 온 아내의 식물과 반찬들을 마구 엉클어 뜨리기 시작한다. 정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탈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층간 소음으로 찾아간 이웃 앞에서조차 재택 근무라는 핑계를 대며 정장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 또한 사회로부터 낙오된 범구를 알아본다.

미영이 마주하게 되는 경쟁 사회 또한 만만치 않다. 자신도 신용불량자라고 어렵게 고백하는 동료를 앞에 두고 역겹다고 돌아서는 데에서 주위를 둘러 볼 여유는 보이지 않는다. 경쟁 사회가 정말 무서운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어느 순간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 미영이 죽기 살기로 마지막까지 매달릴 곳은 ‘실적'뿐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컴, 투게더>의 인물들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우정과 연대를 통해 다시 발걸음을 어렵게 옮긴다. “조금만 더"를 얘기하는 이들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며 몸부림 친다. 과도한 경쟁과 고립,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도 된다는 것. 흙탕물에서 뒹굴지언정 앞으로 가게 될 이 가족의 길은 그 어떤 것보다 의미 있을 테다. 지금 여기에 희망을 데려다 놓고 함께 가자고 하는 <컴, 투게더>가 고마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디로든 '함께'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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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게 용서가 가능할것만 같은 연말의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떠한 감정들은 살아남을테고 어떠한 기억들은 그 연말의 풍경에 묻혀 지나가버릴 것이다. 8개월 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 현장의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 중계된다. 더 이상 목말라 할 것도, 갈증을 채울 수도 없는 죽은 몸들이다. 아키카주는 술로 목을 축인뒤 길바닥에서 이를 다시 게워내며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항상 땀과 피로에 절어있는것만 같은 그에 비해 이 꿈은 좋은 냄새가 날 것만 같은, 갈증과는 거리가 먼 순백의 이미지다. 그런 그에게 형사 아사이는 연민이나 분노, 그 어떤 감정마저도 아깝다는듯 하찮은 비웃음만을 흘리며 조롱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어 마주하게 되는 아키카주의 주변인은 그의 아내이다. 한 때는 그도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았거나 주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잔인한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 혼돈 속에서 대뜸 그의 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처음 광고 속 가족의 이미지로 그의 세계를 착각했었기 때문에 실제의 아내를 마주한 우리는 낯선 사실은 낯설어할 것도 없는- 현실에 떨어진다. 그렇지만 엉망으로 보이는 그에 비해 딸인 카나코는 외모도 반듯하고 학교에서도 많은 이들의 동경을 받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 그녀의 방에서 약이 발견되고 아키카주는 자신이 딸을 찾아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얼굴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딸을 왜 찾겠다는 것일까? 후배나 아내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거 같은 그가 이 일로 인정 받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를 두고보고자 한다. 엉망진창인 삶에서 그가 유일하게 판타지를 완성시킬 수 있는 가족의 일부인 카나코. 그것이 과연 꿈에 지나지 않았음을 다시 혹독하게 마주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모든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원될것만 같은 연말의 풍경에 묻어가게 될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것은 지옥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이들을 위로할 생각도 없이 조롱하거나 방관한다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무기력하게 추락하는 소년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강간당하는 다른 소년의 이미지에 적극 개입한다.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 인물이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카메라와 엉겨붙어 피할데 없이 망가져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카나코를 중심으로 현재 그를 찾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만났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떨어진다. 소년의 기억을 다루는 이미지 또한 아키카주가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꿈 속 기억처럼 푸르고 볕 좋은 날들의 모습이다. 비록 소년은 아무도 없는 수면 아래에서만 안전하다는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이 소년에 대한 기억을 다루는 방식은 어느 감정으로도 납득하기가 힘들다. 분명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폭력적인 장면인데 반해 음악은 어느 청춘 영화의 좋은 한 때를 그린듯 모양새를 취하고 카메라의 시선 또한 매우 적극적이다. 그렇지만 상반되는 것들을 충돌시킴으로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더 잔혹하게 나아가는 서사에 대한 놀라움이 아닌 무례한 연출에 대한 거리감이다.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들을 다룬다 할 지라도 연출자의 시선만큼은 인물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락에 몰린 인간들의 끝을 철두철미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면 이야기는 성공한듯 보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누구든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카나코는 사람들에 의해 그저 으로만 소비되어버릴뿐이다. 사랑했던 소년의 죽음이 그녀를 구멍으로 빠뜨려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감정의 동선을 가늠해보기에는 현재의 시간에 회상씬으로 난입해버리는 그녀의 이미지들뿐이기에 역부족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복선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키카주나 그의 딸만큼이나 멋대로 종횡무진하며 반복되어진다.

 그가 가족이라는 완전체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자 폭력적으로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은 인물들간의 감정이 부딪혀서 진행되는 서사라기보다 그저 대상을 종속시키기 위한 행위 자체로만 비춰진다. 물론 함께 교차되는 장면으로 영화의 후반부에야 설명되는 아내의 외도 현장이 부차적인 설명을 돕는듯하지만 중요한건 여기서 아내의 시점으로 다루어지는 장면은 없다는 것이다. 강간 자체도 불편한데 이를 다루는 카메라의 시선이 인물들에게 있어 편파적이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더구나 너도 카나코도 내가 지켜라는 말로 자신의 강간 행위가 사랑이란 감정에 기반한 것이었음을 설득시키고자 하는 것도 모자라 다음으로 이어지는 대사는 쫑알대지 말고 아침밥 지어!이다. 딸을 찾겠답시고 영화 전반을 이끌어나가는 이 인물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아깝다는듯 그를 대했던 후배 동료 아사이의 태도로 일관해야하는 것일까. 최소한의 공감마저 어려운 것은 이 모든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 존중보다 유희가 전면에 있다는 것이다. 연말의 풍경에서 시작되어 마지막에 이르는 장면은 눈밭 어딘가에 묻혀있는지도 모르는 딸의 시체를 찾기 위해 삽질을 시작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것은 언뜻 그가 이루고 싶었지만 꿈속에서마저 실패한듯 보였던 순백의 이미지로도 보인다. 엔딩 크래딧과 함께 딘 마틴의 Everybody loves somebody가 흐른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사랑하지요. 채워지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채워지기 힘들어보이는 그에게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노래처럼 보인다. 그래도 연말이니 다시 사랑을 얘기해보자는걸까. 글쎄. 연출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역부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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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암중모색 2015. 4. 28. 01:20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두고 다시 생각을 짚어본다. 선택의 연속으로 사건에 놓이고 그것으로 관계나 가치관을 지켜나가는 방식은 좌지우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온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묻기엔 막상 정해진 답도 없지. 실수는 반복되며 잘못은 당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허공을 향해 있을 수도 있겠다. ㅎ언니는 결국 최초의 선택은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고 ㅇ는 돌아가신 신해철님의 말을 빌어 '태어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삶 자체는 결국 덤으로 얻는 보너스라고 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그리고 더 이상 직장이라는 규율에 매여있지 않게 되면서 '선택'의 연속이라는 굴레에 빠져버렸다. 어느 날은 정신을 잃고 어푸어푸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친구가 옷자락을 손으로 집어 올리더니 여기 물, 무릎까지밖에 안 와하며 구제해주었다. 유유하게 부유하고 싶은데 균형을 잡았다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급물살이 밀려온다. (갑자기 <라이프 오브 파이>가 떠오르네.)

 영화 <폭스캐쳐>를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돌보지 않는 이의 최후를 또 한 번 목격한다.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존 뒤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고자하는 이다. 그런 그가 눈에 띈 마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을 때 이 레슬러는 형에 대한 열등감에서인지 앞뒤도 재보지 않고 한달음에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 영화 전체가 전쟁 게임 혹은 흙탕물에서 뒹구는 동물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는데 창 밖으로 멀리서 오는 차를 슬쩍 내려다보며 주시하는 시선이나 매섭게 솟아있는 존의 콧날을 보면 흡사 독수리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불어난 근육을 스스로도 감당 못해서인지 엉거주춤 걷는 모양새가 영장류를 떠올리는 마크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낮은 자세를 취하며 눈치를 보기 일쑤.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존은 레슬러 마크에게 쓰여진 연설문을 낭독하게 한다. 그리고는 명사들에게 소개시키길 새 장난감이나 또 하나의 무기를 자랑하듯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매번 입으로 상표를 갖다 붙인다. 이 게임의 불운을 예견했던 대목은 존과 어머니가 어린 시절(유년기)에 가지고 놀았던--아마 한 때 굉장히 아꼈을--기차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장면이다. 아동 박물관에 기증하면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그는 이제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한다. 비단 장난감 하나를 두고서 하는 말뿐만이 아니라 탱크에 총이 없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거나 하는 정황을 미루어 볼 때 그는 모든게 자신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완벽주의자로도 보인다. 연설장으로 가는 헬기 안에서 독수리가 (날 수 없는) 영장류에게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게 만든답시고 악을 쓰며 집착을 부리는 것은 어떠했나.

 그런 그가 마크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는 장면에서의 대사는 아마 "you stupid, ape"이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horse)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먹고 배설하는 것 뿐이라며 폄하했던 존은 스스로를 조류학자라 칭하는 자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에 비하면 ape, 영장류는 말과 마찬가지로 땅에만 발을 딛는 동물인지라 하찮고 열등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터. 본인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동물을 곱게 못 보는 것이다. 왜소한 체구를 지녔기에 더더욱 상대를 정복하는 모양새인 스포츠 종목에 목을 맸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게 어떻게 또 하필 '레슬링'이란 계기로 흘러갔던 것인지도 궁금하다. (실제 뒤퐁의 이야기를 전해 들어보니 당시 폭스캐쳐 농장에는 레슬러 외에도 수영이라던가 여타 스포츠 종목들의 선수들에게 50여채의 집을 제공했었다고 한다.)

 유년기는 어느 한 때이지만 그것은 살아가는 내내 늘 마음 속을 배회할 것이다. 저마다의 생각을 지켜나가는 방식 또한 끝도 없이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맹신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기에 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기를 소망한다. 감정의 결에 손을 얹어보는거다. 일련의 사건들을 대하고 있는 태도와 감정의 미동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볼 수 있다. 시간은 /  겹겹으로 쌓여있어 / 뒤돌아 볼 수도 있지만 / 기억을 통해 현재의 나와 마주하게 할 수도 / 혹은 / 오지 않은 시간들을  / 어렴풋이  ///// 내다볼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선택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모두가 건강하게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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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미 뱀파이어의 나이로 들어섰으니 죽어도 안 죽은셈 치자하던 우리의 올리베이라 

 이상한 일이다. 그의 영화만큼이나 이상하다. 비오는 밤 즐겁게 술자리에서 웃음을 흘려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또 한 번 거짓말 같은 부고를 접했다. 여전히 기분 좋은 흥에 취해있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년전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만났을 내게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감지했었다. 꽤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그 영화의 이미지들이 기억 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렇게 작년 그의 영화들을 한데 모아 틀어준 서울아트시네마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 미셸 피콜리 할아버지가 위스키를 연이어 주문하던 것처럼 이따금씩 좋아하는 술을 찾아 마시거나 건배를 할 때에는 노년의 세브린느와 마주 앉아 그랬던 것처럼 그를 두고 초를 켜는 날이 여럿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은 어느 시대의 죽음이기도 할텐데 이를 두고 어떻게 발화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영화가 환영이라면, 만져지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에 도달해 결국 손을 바삐 움직여본다. 죽음이라고는 하나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마음으로만 그려보게 될 낙원상가 옥상의 허름한 극장에서 그의 영화들을 보았던 기억. 그와 이 곳을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앞으로 남게될 것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낙원상가 4층 서울아트시네마 

 ‘이 곳을 어쩌다 간간히 찾아왔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어렵지는 않았을까’라는 소용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옥상' 있는 영화관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어마어마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게 거대한 신기루였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트시네마는 그만큼 내게 이상한 열병같은 곳이다. 아마 17년 째 살고 있는 집을 떠난다해도 지금과 같은 마음만큼 그리울거 같진 않다.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수많은 환영들에 사로잡혀 하는 말이겠거니 짐작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지난 20대의 절반은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낙원을 만남의 광장 삼아 친구들을 만났고, 정처없이 헤매이다 겨우 안착해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숙면을 취했으며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요동들을 겪었다. 친구들과 마지막 상영일 날 옥상에 모여들어 마치 초상집 분위기 같다며 깔깔깔 한참을 웃어댔지만 상영 전 극장의 불이 꺼지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여느 때면 맨 앞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눈에 가득 채우고 봤겠지만 그보다도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상영이 끝난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어느 때보다도 대책 없이 아름다웠고 진 켈리의 미소 하나로 3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취해버렸다. 다행이 초상집보다도 졸업식과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 내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고 옥상에 나와 담배를 피며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을 반겼다. 낮에는 옥상 계단에 앉아 처음 이 곳으로 데려와줬던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책임을 물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지 이 곳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겠지만 첫 만남이 언니와 함께였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벌써 그게 8년 전의 일이다.

 해질 무렵의 옥상에 모인 사람들은 난니 모레티 영화의 엔딩 같았고 흐릿한 밤은 아벨 강스의 어느 영화에서 단원들이 마을을 떠나며 손을 흔들어주는 장면의 초월적인 공간 같았다. 김홍준 감독님이 마지막 상영 전 날 말씀하시던게 자꾸 마음에 남는데 어쩌면 10년 이내에 필름으로 영화를 본 경험이 없는 세대가 속출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것 같았지만 옛것을 고집하는 구 세대들의 회포라고만 하기엔 그 날, 그 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목격자들은 너무도 많다. 한 두명이 아니라서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치열하게 돌아가는 필름 너머로 관객들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채울 것이고, 이 목격담은 언제 어디서건 발 없는 유령처럼 발견될 것이다. 오래 앉아있기에는 허리와 목이 너무 아프고 조금만 여차하여 자세를 뒤틀면 잠에 빠지기 일쑤거나 누군가의 시야를 가렸을지도 모를 그 300석으로부터 떠나와서 말이다.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 낙원은 이제 기억에만 남게 되겠지만 우리는 안다. 이 이상한 우정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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